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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의 소설방

푸른 밤, 내가 본 것은 본문

에세이 및 단편소설

푸른 밤, 내가 본 것은

Samesun 2021. 10. 5. 13:11


유달리 푸른 달이 뜨는 밤이었다.

좀처럼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동네 어귀를 서성이던 중이었다. 고단한 하루 동안 충분히 달구어진 내 머리를 차갑게 식히기 위해 나는 정처없이 걷고 또 걸었다. 내 발길이 닿는 땅 위로 달빛을 삼키는 어두운 그림자가 길게 이어졌다. 나는 한적한 거리 곳곳을 쏘다니며 가뜩이나 피곤한 몸을 더욱 혹사시켰다. 이윽고 달에서 발산하는 푸른 광채에 충분히 내 시야가 익숙해졌을무렵, 갑자기 내 걸음이 멈추었다.

분명 자주 보던 동네 공원이었는데, 낯익지가 않았다. 선선한 밤 바람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나무들이 울창했는데 그 아래 전혀 다른 모양의 조형물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언제부터 저 자리에 놓여있던 걸까. 나는 눈을 끔벅거리며 여러 동물이 혼합되어 있는 듯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 동상을 살폈다. 창백한 달빛에 비추어서 그런지 더 기이해보였다. 불분명한 정체 만큼이나 행인이 뜸한 주변 분위기 탓에 나는 뒷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꼭 이렇게 비일상적인 기운을 풍기는 사물은 어째서 밤 산책을 하는 도중에만 만나게 될까. 어쩌면 환한 햇살이 지배하는 동안에는 충분히 아름다운을 뽐내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전혀 눈길을 끌지 못할 것인지도 몰랐다. 푸른 달과 거기에 대비되는 어두운 땅이 있어야 특정 사물이 등장하는 조건이 만족되는 것일지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여전히 눈을 떼지 못했다. 아무렇게나 뒤죽박죽 섞여 있는 여러 동물들의 부위들이 전혀 조화롭지가 않았다. 방향이 한참 어긋난 진화의 과정을 거치다가 발생한 돌연변이일까. 아니면 최소한의 생명 윤리를 저버린 모종의 과학 실험의 실패작일까. 어쩌면 신화에 나오는 키메라와 같은 종류의 괴물일지도 몰랐다. 물론 설치 미술 부류에 해당하는 작품이라면 단순히 괴이한 외관만 보고 함부로 폄하해선 안되는 일이었지만 미적 가치를 두고 비교적 수용적으로 판단하려고 해도 이는 충분히 비정상적인 모습이었다. 나는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는데 지금 보고 있는 불가해한 광경이 평소에 내가 일상 생활을 보내면서 줄곧 마음 속으로 품어온 심정과 맞닿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 생물인지 사물인지 모를 무언가는 이 땅 위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이토록 휘영청한 달빛 아래에서만 모습을 조심스럽게 드러내는 걸 보면 그 습성이 여기 땅이 아니라 저 머나먼 달 어딘가에 더 어울렸다.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직장에서 내가 떠올리는 비합리, 부적응 같은 단어들이 이 동상이 처한 상황과 같은 맥락으로 느껴졌다고 하면 너무 큰 비약일까. 나는 서서히 어둠 속에서 동상의 형상이 뚜렷해지는걸 느꼈는데 이는 정말 실제로 존재하여 두 눈을 통해 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면 속으로 가라앉은 내가 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동안 악착같이 살면서 보낸 나날들이 달에서 땅까지의 기나긴 거리 만큼이나 아득하게 느껴졌다. 이 땅위에 서 있기를 거부하는 것은 이 동상이 아니라 나 였을지도 모르겠다. 문득 달이 완전히 차고 다시 기울기 전에 여기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붙박혀 있다간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밤을 샐 것 같았다. 심지어 내 남은 체력 또한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잠시 동안, 어쩌면 잠시 보다 조금 더 길게, 푸른 빛의 동상 혹은 내 속에서 툭 튀어나온 듯한 무언가를 쳐다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무기력하고 발밑에서 복잡한 상념들이 질질 끌리는 그런 무거운 발걸음이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자, 다시 찾아가 본 공원에 그 동상은 없었다. 빈 자리를 보고도 나는 전혀 놀랍지가 않았다. 자신이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간걸까. 고개를 들어 눈부신 하늘을 살펴보았지만 달은 이미 자취를 감추어 나는 답을 얻지 못했다. 어제보다 더 헐궈워진 잎들을 달고 있는 나무들만이 구멍이 송송 뚫린 격자무늬의 그림자를 사방팔방에 내리깔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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