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의 소설방
선량한 방관자들 본문

어지러운 느낌이 들어 고개를 뒤로 젖혔다. 코에서 무언가 줄줄 흘러내리다가 멈추었다. 코피를 쏟아낼 정도로 몸이 피로했던걸까. 나는 불편한 자세를 유지하며 서둘러 휴지를 찾아서 손을 뻗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건 휴지로 코를 간신히 막고 나서였다. 갑자기 정전이 되었는지 주변 사위가 어두워진 것이다. 난 방문을 조심히 열고 시선을 어둠 속에 고정했다.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전혀 모르는 누군가가 튀어나올 것 같은 익숙치 않고 서늘한 어둠이 집 안에 가득했다. 손전등이나 양초를 따로 구비하지 않았음에도 나에겐 충전 중인 핸드폰이 있었다. 벽을 짚고 콘센트가 있을 곳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시각이 마비되자 유독 내 숨소리와 서벅서벅거리는 발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이윽고 베란다로 들어오는 창백한 달빛에 의해 서서히 집 안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핸드폰을 찾아 순간 방심한 나머지 나는 코에 꽂아 넣은 휴지가 완전히 피에 적셔져 그 사이로 새어나온 핏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어둠 속에서 피와 물은 큰 차이가 없었다.
꼭 이럴 때에만 간절해지는 것이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해있을 이웃들이었다. 나는 베란다 발코니로 나가서 옆집들의 동태를 살폈다. 흔치 않지만 일상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정전이라면 금새 비상 전력이 들어오면서 다시 빛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얼른 손이나 얼굴에 묻은 피도 닦아야 했고 바닥에 얼룩진 흔적들도 치우고 싶었기에 서둘러 상황이 정상화되길 바랐다. 원래도 혼자 살고 있었음에도 예기치 않은 어둠이 닥치자 이 세상에 완벽하게 홀로 남은 기분이 들었다. 한참 동안이나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자 이웃들의 존재가 더욱 궁금해졌다. 누구도 경비실이나 다른 어딘가에 연락을 돌리지 않은 걸까. 혹시 다른 이웃들은 모두 잠에 빠지거나 외출을 나가서 지금 이렇게 어둠에 강제로 갇히게 되는 불상사를 피한 걸까. 그럼 오로지 내 손으로 방법을 찾아야 하는 걸텐데. 나는 하루 종일 제대로 씻지도 않은 내 몰골을 떠올리며 까치집이 되어있는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자신 있게 밖으로 나갈 만한 상태는 아니었다. 코피는 살짝 멎은 것 같았는데 차마 코에서 딱딱하게 굳어가는 휴지 덩어리를 걷어낼 용기는 나지 않았다. 핸드폰을 켜봤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희미한 액정의 불빛만이 나를 반겼다. 나는 결국 현관 문 가까이로 다가갈 수 밖에 없음을 인정했다.
에어컨을 잔뜩 틀어 놓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는 더위가 지배하는 여름 밤도 이미 지났는데, 갑작스러운 전력 사용으로 인한 차단이 이유일리는 없었다. 나는 대충 모자를 눌러 쓰고 핸드폰 불빛에 의지하며 천천히 현관문을 열었다. 계단식 아파트인 이 곳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하기만 했다. 그 많은 가구들이 다 적막 속에 잠겨버린 걸까. 나는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아파트 내부가 모두 암흑 속에 빠져있음을 확인했다. 쥐새끼 한마리 지나다니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는 당연히 어느 층 사이에 멈춰 있었고, 미등 센서는 작동하지 않았다. 이는 내가 어둠을 뚫고 10층의 계단을 직접 걸어서 내려가야함을 의미했다. 그냥 전기가 다시 들어오길 기다리면서 방 안에 앉아있을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그보다 지금 상황에 대한 답답함이 더 컸다. 분명 이웃이 살고 있을 앞 집의 굳게 닫힌 현관문을 살펴보았는데 안에서 누군가 움직이거나 하는 낌새는 없었다. 애들 둘을 키우는 집이었던가? 분명 가끔 같은 층에서 옆집 사람들이 타고 내리는걸 본 것도 같은데, 아이들의 연령이나 외모 조차 특정할 수 없을 정도로 기억이 모호했다. 분명 어린 아이들이라면 이런 어둠에 비명을 지르거나 당황하는 기색을 보일텐데 다들 수면제를 먹은듯 깊이 잠든 걸까. 남의 집 현관을 이렇게 오랫동안 응시하는 내 모습이 수상쩍어보일지도 모른단 생각에 나는 침을 삼키며 다시 몸을 돌렸다. 어차피 정전때문에 인터폰도 먹통이 되어 내가 이렇게 자기 집 대문을 노려보고 있는지 안에서 볼 수 있을리 없었겠지만.
아래 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놓여있는 창문으로 나는 단지 주변을 살폈다. 역시나 사람 한 명 지나가는 모습이 없었다. 바로 정면에서 마주하고 있는 앞 동의 다른 아파트에는 여러 가정에서 불이 선명하게 켜져 있었고 언뜻 사람의 형상을 한 그림자들이 움직이는게 보였지만 그들은 아무도 이 쪽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정전이 된 곳은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뿐인 것 같았다. 세상의 다른 모든 불이 다 꺼질 때까지 앞 동의 사람들은 전혀 눈치도 못챌 것처럼 잠잠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어딘가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발밑을 경계하며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바로 아래층 집들도 침묵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예전에는 이따금씩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찬송가 소리에 새벽 일찍 잠에서 깬 적이 있었는데, 무척 독실한 신자 이웃이 살고 있는지 문 위에 나무로 된 십자가가 박혀 있었다. 혹시 어둠을 틈타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 있는게 아닐지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나처럼 굳이 밖에 나와 법석을 떨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목회자들은 인내심이 비교적 두터울 거라는 내 편견이 한층 강화되었다.
나는 계속해서 지상으로 내려가는 발걸음에 집중했는데 애시당초 담력이 센 편이 아니어서 그런지 자꾸만 뒷덜미가 오싹해지는건 피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웃들이 모두 현관문 가운데 나 있는 조그마한 구멍을 통해 밖을 살피고 있고, 어둠을 헤치며 내려가는 나를 말없이 염탐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으스스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도 그럴것이 지금과 같은 비정상적인 상황에도 다들 문을 꼭 닫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이 너무도 기이했다. 그렇게 경계심에 사로잡혀 몇 개의 층을 더 내려오다가 나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뻔 했다. 장승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거대한 식물을 품고 있는 화분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집 앞에 떡 하니 자리잡고 있는 당혹스러운 사물 앞에서 나는 얼굴도 모르는 이웃의 특이한 취향을 저주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마지막 일층까지 도착하고 나서 나는 굳게 닫힌 아파트 유리문을 발견했다. 전혀 기대와 다른 영화의 결말을 본 것처럼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한번도 이 문이 잠겨 있던 적이 없었는데.. 비틀거리며 유리문 앞에 다가가 여기저기를 살펴보았지만 열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체면이나 예의를 차리는 일이 소용없음을 알고 고함을 크게 지르면서 문을 두들겼다. 쾅쾅거리며 조금씩 문이 부서질듯 부서지지 않는 소리가 적막을 깼다. 얼룩이 군데군데 번져 있는 유리를 통해 바라본 바깥 세상은 평소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으나 행인은 없었다. 다만 바로 가까운 맞은 편 건물의 발코니 위로 한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담배를 태우는지 회색 연기가 조금씩 피어올랐다. 그는 필사적으로 내 모습을 무시하는 건지 아니면 내가 전혀 보이지 않는 건지 이 쪽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이윽고 난 이토록 시끄러운 소란을 피웠는데도 불구하고, 건물 내부가 소름끼치도록 잠잠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 안에서 두려움에 몸서리치는 사람이 오직 나 혼자 뿐이라는 사실도. 아니, 왜 아무도 살고 있는 것 같지가 않은거지?
서울로 상경하여 이 곳에 터를 둔 것은 몇 해 전의 일이었다. 나는 무리하게 대출을 받아 간신히 이 곳 아파트에 들어올 수 있었으나 워낙에 수입이 고정적이지 않은 프리랜서의 특성상 그 뒤의 자금 사정이 쉬이 나아지지 않은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자신만만했던 처음과 달리 어느 순간 일이 끊겨버려서 당장 다달이 빠져나가는 이자를 갚는 것도 어려워졌고, 나는 근근히 자전거로 배달 알바를 뛰면서 생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언젠가 한 번 크게 넘어져 몸을 다치고 나서는 계단을 오르고 내려가는 것도 힘이 부쳤다. 그 뒤로 건강이 악화되었는지 이상하게 몸이 매일같이 점점 무거워졌고, 나는 한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챙겨먹기는 커녕 라면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곤 했다. 가끔씩 열린 창을 타고 들어오는 옆집의 고기 굽는 냄새가 내 식욕을 자극하는것 말고는 별다른 삶의 의욕이 없었다. 온종일 깊은 잠을 자다가 밤이 되어서야 미적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그런 은둔자의 모습이 내 현실이었다. 이렇게 정전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지 않는 이상 난 동굴에서 나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핸드폰은 완전히 방전되어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나는 차가운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손 끝부터 서서히 힘이 빠지는게 몸 상태가 심상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뭐하나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점점 졸음이 밀려왔다. 코피는 완전히 멎은 모양이었다. 더 이상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현실의 경계가 흐려진 혼곤한 상태에서 난 내가 사실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적이 전혀 없었다는 걸 떠올렸다. 계단을 걸어 내려온적도 없었다는 걸. 어느 순간 셔터가 내려간 것처럼 내 눈 안으로 빗발치던 불빛들이 모조리 사라져버렸다. 이상 징후가 처음 찾아왔을때부터 몸을 살폈어야 했는데. 수명이 다해가는 사람들이 흔하게 내뱉는 후회였다. 나는 스스로를 내버려둔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둠이 잔잔하게 깔려 있는 내 주변으로 마지막 숨이 사라질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최대한 빠르게 발견되면 좋으련만. 마지막으로 내가 바란 것은 너무도 간단하면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곧이어 날이 다시 밝아왔고, 방 안으로 햇살이 가득 들어찼다. 샤워를 하거나 분주하게 집 안을 걸어다니는 등 외출 준비를 하고, 문이 열고 닫히며 주민들이 서둘러 오고가는 생활 소음이 한동안 들려왔다. 누군가는 아침부터 소리내어 크게 웃었고, 혹은 목놓아 울었다. 하지만 아무도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저마다의 일상이 무척이나 소중한 이 곳 주민들에겐 너무도 다행스럽게도, 지난 밤에 정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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