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7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S.S의 소설방

펜과 폰 본문

에세이 및 단편소설

펜과 폰

Samesun 2021. 10. 7. 22:57


지극히 오랜만이다. 펜을 잡는다는 상투적인 표현 대신 글을 쓰기 위해 핸드폰을 잡고 열심히 손가락을 움직인것이. 펜과 폰은 한 편의 짧거나 긴 글을 도출해낸다는 점에 한해서는 결과를 공유하지만 그 끝에 이르는 지난한 과정이 사뭇 다르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언제든지 아래 왼쪽으로 꺾여있는 화살표 버튼을 눌러서 앞선 글을 지우고 자유롭게 새 것으로 위장하여 써내려갈 수 있는 폰과 달리 펜은 그 특성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비가역성으로 함축된다. 펜으로 한 번 써내려간 글귀는 그 위에 찍찍 가로 줄을 긋고 다시 새로운 글로 시작하지 않는 이상 수정되지 않는다. 수정의 행위는 필연적으로 지저분하게 일그러진 잉크들의 범벅으로 점철된 흔적을 남긴다. 미적으로 결코 뛰어난 감각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본인을 포함하여) 보기에 정돈되지 못하다는 불편한 인상을 갖게 된다.

여기저기 검게 칠해진 구멍들로 뻥뻥 뚫려있는 글은 마치 엄혹한 냉전 시대를 상징하는 묵직한 국가 프로젝트 들에서나 볼법한 검열되고 삭제된 기밀문서들을 떠올리게 한다. 아무리 문방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얀색 수정테이프를 가져와 이를 글에 난 상처에 덧대어 영리하게 치료한다 하더라도 말끔하게 처음의 종이로 환원될 수 없는 현실이 새벽밤 사이 숨어있다 등장하는 민망한 기억에 이불을 뻥뻥 차게 만드는 내 실수투성이 과거와도 닮았다.

차라리 종이라면 아무렇게나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져 넣을 수라도 있지만, 삶은 그럴 방법이 없다시피 하다. 그렇기에 어쩌다 한번씩 소중한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거나 하기 위해 펜을 들때마다 그 어느때보다도 심사숙고하면서 신중하게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쓰는 게 아닌가 싶다. 마치 내 인생을 풀어낸다는 느낌으로. 폰으로는 채울 수 없는 감정이 펜촉에 가득 담겨 있다. 그래서 잘 써진 편지는 단순히 폰으로 메세지를 찍어보내는 것보다 다른 이의 마음을 더 울리는걸까. 그 안에 들어간 정성이 극진하다고 상대방이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편지로서는 본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일테고, 한번이라도 글을 써본 사람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그 곡예를 타는 듯한 아찔함도 느낄 수 있으니..

그래서 난 오늘도 폰이나 노트북으로 이렇게 글을 쓰다가도 어쩌다 한번 정도는 무언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고 책상 옆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펜과 수첩을 보면서 생각에 잠기곤 한다.

'에세이 및 단편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Dear my _  (1) 2021.10.13
마주치는 영원  (2) 2021.10.08
선량한 방관자들  (0) 2021.10.06
푸른 밤, 내가 본 것은  (0) 2021.10.05
은둔자와 모기  (0) 2021.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