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의 소설방
귀갓길의 일식집 본문

술잔에 담긴 투명한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가면서 쓰라린 뒷맛을 남길 것을 상상하며 나는 천천히 인파를 헤치며 걸었다. 유난히 생각할 거리가 많은 퇴근길마다 단골로 찾아가는 일식 집엔 오늘도 사람들이 붐볐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하루 종일 방문했을 수많은 손님들을 위해 요리사들이 냉장고에서 꺼내왔을 횟감들의 비릿비릿하면서 눅진한 냄새가 훅 끼쳤다. 그 냄새가 진하면 더 진할수록 오늘의 식당이 나의 하루에 못지않게 얼마나 고단한 시간들을 보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뒤늦게 도착한 내가 온종일 이어진 격무로 불거진 피곤을 잠시나마 잊고 만찬을 즐긴 후에야 비로소 이 곳의 일과가 종료될 예정이었다. 다른 이의 방해를 피해 오로지 혼자서 복잡한 마음을 뒤적거리고 싶을 때마다 찾게 되는 이 곳의 존재가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두근거리는 속을 달래며 도착한 내 앞에는 이미 대기 중인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는데다행히도 나 혼자 앉을만한 바 테이블 좌석은 비어있어서 기다림 없이 바로 입성할 수 있었다. 나 같은 혼술족에겐 기적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큰 행운이었다. 연인 혹은 가족, 친구들로 삼삼오오 모여있는 사람들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뻘줌하게 침이나 삼키고 있는 건 결코 반기는 일이 아니었다. 낯익은 얼굴의 주방장은 나를 보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고 나 역시 화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중요한 작업을 앞두고 최선으로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눈 앞의 책상부터 정리정돈하듯 나는 테이블 위에 휴지를 깔고 가지런히 수저를 올려놓았다. 어쩌면 나에게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을 무수한 불행들의 속도를 낮추고 그들의 급한 마음을 달래기 위한 의식과도 같았다.
도자기로 만든 물컵에 담긴 냉수로 가볍게 목을 축이고 나는 술 한 병을 추가로 주문했다. 건강을 생각해서 오늘 부릴 청승의 한도는 한 병 정도로 그치자고 결심한 터였지만 과연 제대로 지켜질리는 장담할 수 없었다.
매번 주문하던 쉐프 특선 메뉴를 시키고 나는 군침을 삼켰다. 동네 근처에는 여러 음식점들이 있지만 유독 이 곳 앞을 지나칠 때면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건 쉐프 특선에만 나오는 풍부한 메뉴 구성 때문이었다. 사시미 몇 점과 초밥은 기본이고, 우동과 샐러드, 후식으로 고로케와 새우튀김, 마끼와 과일까지 일식에 대해선 특별히 편식을 전혀 하지 않는 나에겐 최고의 만찬이었다. 심지어 훌륭한 맛과 풍미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게 내 만족스러운 저녁을 위해 준비되어있었다. 바로 먹지 않으면 금새 뻣뻣해지는 소고기 불초밥을 제일 먼저 집었다. 곧이어 고독에서 오는 묘한 안락함을 안주삼아 신명나게 술을 들이키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같은 부서 과장의 이름과 직급이 액정 화면에 번뜩였다.
내 갈비뼈에서부터 가벼운 통증이 느껴진 것은 그때였다. 다음주까지 진행하기로 예정된 프로젝트 건에 대한 문의일까? 아니면 오늘 제출하고 온 통계 보고 건에서 발생한 단순 오류에 대한 항의일까? 아니면 술에 만취해서 통화 버튼을 잘못 눌렀다던가? 어떤 이유에서건 나에겐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현실이었다. 차라리 술병을 한 두 병 더 비우고 불콰하게 취한 상태에서 전화가 울렸다면 난 그동안 가슴 속에 응어리진 말들을 수화기 너머로 힘차게 쏟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겠지만 솔직히 그럴 자신은 없었다. 행여나 이미 내가 만취한 상태라 할지라도 이미 한주간의 피로가 누적된 탓에 그럴싸한 반항도 못해보고 풀이 죽을 공산이 컸다. 나는 술 한잔을 마저 삼키고 핸드폰에 손을 가져댔다.
어릴 땐 학원을 땡땡이치고 집에서 숨죽이고 있다 보면 불쾌하리만치 강렬하게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가 그렇게 듣기 거북했다. 나이를 한참 먹었어도 그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거부감은 여전히 내 속을 긁어댔다. 극심한 피로감이 삽시간에 밀려왔지만 나는 애써 무심한 척을 하며 진동하는 핸드폰을 다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나의 지난한 회사 생활 전부가 먹다 남은 초밥 접시 옆에서 저런 모양새로 웅웅거리며 울려대는 것 같았다. 언제까지 이 줄다리기가 이어질지 한번 지켜나보자 하는 심정으로 나는 핸드폰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한시도 멈출 생각을 안 하는 핸드폰에서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알갱이들이 떨어져 나와 점차 내 시야를 가득 메우는 것 같았다.
이윽고 간장 종지가 바닥에 엎어져 사방팔방으로 그 내용물을 스며들게 하는 것처럼 어둠이 내 주변을 감싸 안았고 그 안에는 나와 번쩍이는 핸드폰 불빛만이 떠다녔다. 심지어 아직 전화를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누군가 익숙한 어조로 고성을 질러대는 소리가 들릴듯 말듯 귓가에 맺히는 듯 했다. 이미 알코올이 증발해버린터라 점점 늘어붙고 있는 입 안에서 쇠맛이 나기 시작했을 무렵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액정 화면이 그 수명을 다하고 깜깜해졌다. 아득한 어둠 속에 수감되었다가 삽시간에 풀려난 느낌처럼 눈이 따가웠고 뒷골이 서늘했다. 술은 어느새 동나있었다.
긴장이 풀리자 주변 사위가 보였는데 주방장은 벌써 라스트 오더를 마치고 마감 준비를 하는지 손동작이 눈에 띄게 느슨해졌다. 식당에 남아 있는 손님들도 나를 제외하곤 한두명 뿐이었다. 때문에 난 술 한병을 더 시키기를 멈추고 냉수로 목을 축이는 정도로 작은 술자리를 마무리짓기로 했다. 하지만 뭔가 찝찝한 것은 무언가 제대로 결론이 나지 않은 느낌이었다. 잠깐의 무용한 고민 끝에 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쉽지만 오늘의 저녁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역시나 오늘도 느껴지는 씁쓸한 뒷 맛은 비단 술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어째서 전화를 받지 못하고, 술잔을 혼자 술병에 부딪히면서 미소 짓고, 이 익숙한 광경에서 오히려 위안을 얻고 다시 이러한 상황을 반복하게 되는지, 구태여 변명하지 않아도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의 내가 어떤 모습이 될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그 까마득한 어린 시절의 내가 이불 속에 몸을 숨기고 긴장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던 수화기의 요란했던 벨 소리는 여전히 내 뒷꽁무니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때의 난 결국 작은 용기를 내어 그 전화를 받았을까. 그리고 당당하게 내가 원하는 바를 말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을까. 아니면 차라리 전화선을 뽑아버리고 부모님에게 야단을 맞았을까. 어쩌면 그때의 내 선택에서부터 이미 모든 날들이 예정되어 버린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집으로 향하는 내 발끝을 살짝 스쳤지만 뒤늦게 올라온 술기운에 금방 잊혀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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