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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의 소설방

식어버린 커피 만큼 흔한 일은 없다 본문

에세이 및 단편소설

식어버린 커피 만큼 흔한 일은 없다

Samesun 2022. 4. 14. 08:23


군데군데 얼룩이 묻어 있는 흰 종이를 한참동안이나 들여다보았지만, 애시당초 무엇을 쓰려고 했던 건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억지로 결이 맞지 않는 단어들을 조합해내서 간신히 덧칠을 해가면서 의미를 부여하는 그런 심정이었다. 과감하게 그어놓은 일정한 선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답답한 대화 속에서 난 체념 가득한 눈을 하고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얼핏 보면 무례하기 그지없는 한숨이 내 입에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와 볼륨으로 흘러나와 마주한 상대방의 얼굴 위로 한가득 쏟아져내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표정은 한참 전부터 일정하다. 어딘가 얼이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살짝 분노가 서려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아이스 라떼를 시켜도 무방했을 정도로 차갑게 식어 있는 커피잔을 톡톡 건드리면서 난 애꿎은 카페의 고요한 분위기를 탓한다. 실없는 소리라도 툭 던지면서 무겁게 가라앉아있는 상황을 벗어나려고 해보았지만, 그런 나의 시도는 그저 신인 배우의 연극톤마냥 어색해보일 따름이다. 상대의 시선은 이미 내 등 뒤의 메뉴판에 고정되어 있었는데 당신의 고약한 농담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모양새다.

우리 둘이 함께 지낸 일년의 세월이 짧으면 짧게, 길면 길게 다른 속도를 타고 각자의 머릿속에서 스쳐지나간다. 얼마 안 있으면 마지막 독대를 마치고, 서로 제 갈 길을 가버릴 사이에 불과했지만, 지나온 나날들이 그들의 발목 아님 손목에 묵직하게 걸려있다. 물론 난 이제 슬슬 어딘가 평정심과는 거리가 먼 공간을 벗어나고 싶었는데, 그건 내가 ‘남아있는 사람’이고, 맞은 편의 그는 ‘떠나는 사람’이라는 반대되는 입장 차이에서 기인할 따름이었다. 엉덩이가 나도 모르게 들썩이는 걸 눈치채고 싶지 않았기에 헛기침을 했지만 이미 그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은 조급해보였다. 다른 부서로 급작스럽게 옮기라는 인사 발령을 통보받은 그와 이렇게 사적인 대담을 나눌 일도 이제 거의 없을 것이다. 인사이동이 잦은 회사는 아닌터라 일년 만에 그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떠나게 될 줄은 차마 예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모종의 압박이 작용하지 않았다면, 이런 예측 불허의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사수와 부사수로서 보내온 일년의 기간은 우리에게 서로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남아있을 사람의 머리에선 왠지 모를 죄책감 때문에 자꾸만 곱씹게되어 그런지 더없이 길게만 느껴질 뿐이었지만, 떠나는 사람은 단 한번의 눈 깜빡임만으로도 그 모든 시간들을 남김없이 체험할 수 있다.

아쉬움이 짙게 남아있는 목소리로 그가 나에게 그동안 감사했다고, 어찌 되었건 한 해동안 배운 업무나 이것저것 실상은 그닥 큰 쓸모가 없는 스킬들을 앞으로도 유용하게 사용할 거라고. 어느정도는 진심이 담겨 있는 말을 나에게 건넨다. 나 역시 수고스러운 일이 참으로 많았을텐데 나름 잘 버텨주어서 고맙다고, 어차피 떠나는 마당에 나쁜 감정은 모두 커피에 섞어서 뱃속으로 흘러보내고, 어차피 회사라는 곳은 어딜가나 다 비슷비슷한 족속들이 존재하며 금새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면 그만일 것이라는 등의 너무도 뻔해서 비겁하다고 부르기도 부족할 수준의 위로를 건넬 뿐이다. 그가 전혀 원하지 않는 결말을 맞이한 점에 대해서 다시 한번 유감이라고 말하면서 나는 우리에게 남아있는 잔여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손목시계를 연신 힐끗거린다. 이제 사람의 손때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더 이상 인사통보를 받은 사람의 실망어린 표정을 바라봄으로써 겪어야 할 스트레스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고 한들 나는 완전히 죄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에 대해선 몹시 의심스러웠다. 그는 순전히 내 지도를 믿고 내 조언을 참고삼아 행동하고 일하려고 노력했고, 그런 애쓰는 모습들은 여전히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물론 그가 겪어야 할 일들에 대해서 그의 책임이 전혀 없진 않을 테지만 말이다. 누구보다 이기적으로 생각해야 버티기에 훨씬 용이하고, 정신적인 수양을 위해서 다니는 곳도 아니고 덕을 쌓기 위해서 다니는 곳도 아닐텐데, 이 회사에서 정을 느끼는 순간이 조금은 있을 수도 있다고 한다면, 그 대상이 이제 곧 영영 자취를 감출 터였다.


어디선가 또 다른 누군가 역시 원하거나 원치않는 변화를 겪을테고, 그걸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못하거나와 상관없이 감정이 세차게 흔들리는 걸 느낄 테다. 집에 틀어박혀서 많은 이들의 요청에도 암막 커튼을 굳게 내리고 나오지 않을 지도 모를테고. 혹은 잽싸게 적응하여 다른 삶의 경로를 타고 나아갈 수도 있을테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다고 해서 결코 잘못이라고 타박할 필욘 없을 것이다. 나 역시도 새로운 것에 대해 신선함보다는 두려움을 더 크게 느끼는 종류의 사람이니까. 하지만 이미 식어빠져서 향과 맛을 절반 이상은 공중으로 반납해버린 커피 만큼이나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기도 한 것이, 우리가 새롭다고 느끼는 대부분의 일일지도 모른다. 그저 그가 덤덤하게 이겨내길 바랄 뿐이다. 남은 커피가 고여있는 잔을 쟁반에 다시 담아 원래 있던 자리에 갖다놓고 카페를 벗어나면서 나는 조용히 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언제고 응원의 손길이 필요하다면, 찾기만 한다면 내가 다시 커피 한 잔 정도는 사줄 수 있을 거라고 중얼거리면서.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작별 인사이자, 마지막 배려였고, 그의 시야가 다시 좀전과는 조금 달라진 거리의 풍경으로 가득 차오르는걸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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