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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의 소설방

올해의 마지막 출근 본문

에세이 및 단편소설

올해의 마지막 출근

Samesun 2022. 1. 1. 14:00

어느덧 저녁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퇴근을 앞둔 시각이 되었다. 겨울이면 해가 빨리 지는 탓에 짙게 깔린 어둠이 귀갓길의 말동무가 되어주곤 했다. 혼자서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보면 발걸음이 멎기 전까지 시간의 흐름을 전혀 느끼지 못할 수도 있었다. 매번 그랬듯이 퇴근 시간이 되면 피시를 끄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사무실을 득달같이 벗어날 것이다. 올해의 마지막 하루를 어떤 내용으로 기록해야 할지 고민해보았는데 역시나 특별하게 다른 이야기는 없었다. 아침에 사무실에 오자마자 공복 상태의 커피를 마시고, 점심으로 간단하게 컵라면과 김밥으로 끼니를 때운 것을 보면 더더욱 색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자기복제에 머무른다는 평을 들은지언정 억지로 현실에 어울리지도 않는 무언가를 창조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몇 잔의 커피를 마셔야 과장이 되고 팀장이 될까. 그런 요상한 의문을 품어보면서 나는 남은 커피를 단숨에 비워냈다. 이미 차갑게 식어버렸지만 나른한 정신을 깨우기에는 충분히 강렬한 향이 입 안에 감돌았다.

말일로 갈수록 당해연도가 바뀌기 전에 마무리지어야 하는 업무들이 제법 있었다. 급한 성미 탓에 일을 서둘러 처리하려는 내 업무 방식에도 불구하고 물리적 시간은 한계가 있었다. 야근을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지만 빼곡하게 적혀있는 업무 목록은 보기만 하도 아찔해지는 수준이었다. 정신없이 결재란에 내 이름을 올리는 와중에 문득 팀원들에게 연하장을 써볼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으나, 잠깐 짬을 내서 편지지를 사러 갈 여유는 없었다. 더군다나 내가 쓴 편지가 그들에게 성가신 종이처럼 여겨질 수도 있었다. 주고 받을 때는 세상 따뜻한 표현이 가득한 인삿말을 건네다가도 집에 들고 가서는 처분하기가 애매해지는 청첩장들처럼 말이다. 차라리 비싸고 맛있는 걸 새해에 사주는 게 낫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글쓰고 읽는 것을 나만큼 간절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기에 그런 선택은 일견 필연적이라고 느껴졌다. 나이가 들수록 되려 내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자세에서 소심함이 진하게 묻어났다. 해가 갈수록 여러 각양각색의 사건들을 거치면서 생각해봐야 할 지점들이 점차 많아진 탓이다. 나는 한번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내부를 스윽 둘러보고는 기지개를 켰다. 관절에서 아귀가 잘 맞지 않는 듯 뿌드득 거리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내 주위엔 그동안 함께 술잔을 기울이면서 고통을 쓸어내렸던 사람들이 보였다. 그리고 새해엔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웃을 일이 더 많아지길 투명 연하장에 꾹꾹 눌러쓰고는 조용히 속으로 삼키는 내가 있었다.

이윽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정신없이 일을 하다 보니 마지막 하루가 끝이 났다. 내일부터 또 다른 해의 비슷한 하루들이 연이어 따라올 것이다. 분명 새로움이라곤 크게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유사한 나날들이 올 것이지만, 정말이지 현 상황보다 나아질 확률은 희박할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철이 들지 않은 어린 아이처럼 괜시리 마음 한 켠이 설레왔다. 퇴근 시각이 되자 뻣뻣한 인사도 잘 주고 받지 않던 평소와 달리, 팀원들은 하나둘씩 서로에게 다가가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어떤 해묵은 감정이 있던 간에 웃는 얼굴로 축복을 빌어주는 이 단순한 의식 하나만으로도 앞날에 대한 근거 없는 희망이 생겨난다는 것이 놀라웠다. 내일 떠오를 동일한 햇살 아래에서도 다른 감정을 느낄 수 있는건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가질 수 있는 신기한 장점이 아닐까. 또 이런 요상스러운 생각을 하다가 난 짐을 챙겨 사무실을 뛰쳐나왔다. 아, 물론 나 역시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삿말은 결코 빼놓지 않았다. 그럼 다들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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