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의 소설방
밤 애호가 본문

밤을 통과해 지나간다는 표현은 얼핏 상투적이고, 뻔해보이지만 유독 마음에 쓰였다. 밤을 다룬 여타의 표현들도 마찬가지로 내가 좋아하는 문장 리스트에 꼭 포함되었다. 밤이 가지고 있는 환상적이면서 아름다운 이미지들이 언제부터 내 정서 속에 깃들어 있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난 기억이 가물한 어린 시절부터 밤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제목의 책들을 장바구니의 우선 순위로 올리곤 했다. 그 어떤 분야의 책이라도 상관없었다. 그저 밤이라는 글자가 촘촘하게 박혀서 흔들리지 않고 붙어있기만 한다면 난 과감하게 그 책을 서가에서 꺼내들었다. 사람의 기호를 관장하는 뇌의 특정 구역이 있다면 거기 어딘가에 밤이라는 인장이 굳게 찍혀 있을 것이 분명했다. 평생을 걸쳐 수집한 탓에 밤이 등장하는 책들이 서재 곳곳에 중구난방으로 꽂혀 있다. 그 덕분에 언제든지 필요한 순간에 난 집안을 들쑤시지 않고도 평온한 마음으로 밤을 맞이할 수 있었다.
심지어 밤을 배경으로 그려놓은 명화들도 금이 간 핸드폰 액정으로 보거나 멋들어진 전시회장에서 보거나 어떤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내 시선을 단숨에 빼앗곤 했다. 밤의 레스토랑을 그린 고흐의 유명한 그림을 보면서 난 손을 잡고 있던 연인의 걸음을 놓칠 정도로 그 황홀한 세계 속에 빠져들었다. (당시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열렸던 고흐 전시회는 나와 연인에게 다른 기억으로 남고 말았다.) 물론 무작정 어둠만이 가득찬 캄캄한 광경만을 내가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둡기 때문에 더 밝게 보이는 것이 있었다. 날이 좋을때면 유난히 반짝거리는 별빛이며 푸르스름하게 번지는 가로등, 창 틈으로 새어나오는 가느다란 불빛들이 밤을 조금씩 비춰주었고, 나는 그러한 작은 빛들 속에서 어둠이 더욱 선명해지는걸 감탄하면서 바라보곤 했다. 그런 어둠 속 빛의 반전은 단지 망막에 맺히는 풍경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었다. 암전된 방에 갇혀서 눈물 콧물을 휴지에 찍어내고 나서야 난 정작 내가 원하고 바라는 일들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곤 했다. 당시에는 삶에서 철저하게 내팽겨쳐졌다고 여겨졌던 그런 순간들이 있었기에 나는 미래에서 비쳐오는 실금처럼 얇고 희미한 빛에 매달릴 수 있었다.
이렇게 퇴근할때마다 땅거미가 진 도로를 거닐면서 난 한낮에는 좀처럼 살펴보지 못한 나 자신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다. 내가 밤의 장면에서 보는 것은 친절함과 배려로 무장한 한낮의 내가 아닌 솔직하면서도 취약한 본성을 가진 한 명의 사람이었다. 평소엔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신비스러우면서도 낯익은 무언가가 어딘가에서 가냘픈 숨을 내쉴 것만 같은 어스름한 광경을 바라보면서 하루종일 피로에 시달리며 온몸에 잔뜩 쌓인 해감을 뱉어냈다. 밤의 거름망에 그 모든 찌꺼기를 걸러낸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같은 검은색이라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사물들이 참 많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달밤 아래 비치는 연한 빛과 그 빛을 감싸는 그림자에 마음이 동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물론 밤을 좋아하는 데에는 본인의 내면을 반추할 수 있는 사색이 가능해야 한다는 식의 거창한 자격은 필요없다. 어둑해진 하늘과 땅 사이에서 조용히 반짝이기 시작한 세상을 바라보는 데 심취하기만 하면 그것으로도 밤 애호가로 불리기엔 충분할 것이다. 누구나 밤의 거리를 따라 걸어다니며 자신이 언제든지 암흑과 빛의 교차점이 되는 걸 느낄 수 있다. 따라서 난 더 많은 사람들에게 환하게 밝은 대낮 못지않게 짙은 밤의 어둠과 고요를 좋아해보라고 감히 권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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