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의 소설방
6시를 넘어 본문

지금, 그는 업무를 마쳤을 것이다. 그리고 모니터 전원에 손가락을 갖다대려는 찰나, 팀원 전원 회의실로 집합하라는 전언이 들려올테고, 그는 기념일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약소한 선물 조차 준비하지 못한 가난뱅이 남편의 심정이 되어 쓰다만 보고를 들고 터덜터덜 걸음을 옮길 것이다.
당연히 완성이 되고도 남았을 시각이라고 외치는 팀장의 혹독한 추궁 앞에서 그는 시간의 상대성 이론이 본인의 인생을 토대로 증명되었음을 느낀다. 아니, 느낄지 모른다. 이미 피복이 벗겨져 시커멓게 타버린 전선들로 간신히 이어져 있는 전류처럼 그의 감정 또한 희미하게 전달되고 있을 터였다. 그의 귀 안에 자리하고 있는 널따란 평원에는 좀전부터 주먹만한 눈이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하얀 눈은 스폰지처럼 모든 외부의 소리를 삼켜버렸다. 듣기 힘든 단어와 문장들이 쏟아질때마다 늘상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의 시선이 점차 현실에서 멀어지는 걸 알아차린 팀장이 호통을 친다. 세상 그 어떤 알람 시계보다 거칠게 다그치는 울림 소리에 그의 내면에 거대한 소란이 인다. 질의 응답의 간격이 무척이나 촉박하게 짜여진 심문의 대상이 되어버린 그는 불쌍할 정도로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아니, 대개는 말문이 막혔을 것이다. 어떤 답변을 떠올리더라도 거기엔 들끓는 쇳물과 깊은 구렁텅이가 도사리고 있었다. 자신의 일부를 조금씩 함정 속으로 밀어넣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는 무어라 말을 하긴 했다. 그건 가당치 않은 소리라고, 이 회의실에 있는 그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할 헛된 소리라고, 그가 갖고 있는 자그마한 두뇌로는 결코 달성할 수 없는 조건들을 제시하면서, 요구사항이 줄줄이 붙은 나머지 애초에 한없이 작았던 대답이 점차 걷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그 무게를 더해가는 걸 그는 막을 수 없었다.
마구 흔들리면서 뒤섞이는 형형색색의 물감 통을 무방비하게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혼란스러운 감정은 회의시간이 끝나고 나서도 쉬이 가라앉지 않을 것이 분명했고, 이미 평화롭고 여유로운 퇴근길에 대한 소망은 요원해졌다. 그가 한때는 자신의 것이라고 믿었던, 아니 자신의 것이 될거라고 믿었던 저녁 있는 삶은 산산조각나버렸다. 그는 아픈 발에 붕대를 메어감고 조각난 파편 위를 걸어다니는 부랑자가 되어 어두운 회의실 내부의 구석으로 깊이 가라앉았다. 그때였을까. 무지막지하게 쏟아지는 짜증과 모욕 속에서 그가 정신을 잃어버린 것은. 아무렇게나 써놓은 수첩의 메모들이 일제히 흔들리며 그 형체를 잃어갔다. 가느다란 낚싯줄 같이 남아 있는 이성의 끈은 좀 더 팽팽해지다가 끊어져버렸고, 그는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곤 사무실을 뛰쳐나왔다. 아니, 뛰쳐나오는 상상을 했다. 그는 여전히 부동의 자세로 식은 땀을 뻘뻘 흘리며 앉아있었다.
본인의 육체가 투명해지다 못해 소멸되어감을 느꼈을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살아 생전 겪을 수 없는 희한한 상태였지만, 그에겐 익숙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그가 완전히 생을 놓아버리기 직전에 팀장의 화살은 다른 팀원에게로 향했다. 나이가 몇살 더 어린 팀원은 거의 울먹거리다시피 답변을 하려고 애썼는데 한 마디가 채 종결되기도 전에 팀장은 말벌이 낯선 이의 살갛을 향해 최후의 일격을 가할때처럼, 상대를 쏘아붙이고 벼랑 끝까지 몰아세웠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익숙한 광경을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또 다른 희생양이 늘어나고 있었음에도 그저 잘 버텨주기만을 바라는 것 말고는 그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윽고 폐곡선을 그리면서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던 회의가 끝이 났고, 아니 잠깐의 휴지기를 맞이했고, 그는 수용소에서 탈출하는 심정으로 힘없이 걸어나왔다.
오늘 하루 열심히 일한 그에게 주어진 보상이라곤 약간의 편두통과 찝찝하면서도 불쾌한 감정의 잔여물 뿐. 그는 서둘러 짐을 챙기곤 인사를 하는둥 마는둥 하고 자리를 떴다. 도망쳐나왔다고 하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그에게 부여된 저녁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유로움을 누릴 수 있을 정도의 체력도 정신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여섯시를 넘어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이 고갈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격한 갈증과 허기를 느꼈으나 이내 침을 삼키는 것으로 대신했고, 그보다 더한 피로가 찾아들었기에 운좋게 빈 자리에 앉자마자, 곧장 옅은 잠에 빠져들었다. 덜컹거리는 지하철에서 숙면을 취하기란 여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잠에 빠져든다고 해서 그가 방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모조리 잊어버릴수는 없었다. 그는 다시 일을 하는 꿈을 꾸었다. 책상에는 정리하지 못한 보고서들이 지저분하게 쌓여 있다. 익숙한 공간임에도 낯선 느낌이었고, 찾고자 하는 자료는 어디에도 없었다. 광활한 사무실에 홀로 남겨져 불안에 떠는 심정이 되어, 그는 꿈 속을 헤맸다. 퇴근 시각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완성되지 못한 보고가 맘에 걸렸다. 그의 불안과는 상관없이 꿈 속에서도 시간은 흘렀다. 그리고 지금, 그는 업무를 마쳤을 것이다. 그리고 모니터 전원에 손가락을 갖다대려는 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