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의 소설방
기묘한 남자 본문

크리스마스가 다가올수록 그가 단지 곳곳에서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이 더욱 자주 목격되었다. 나는 항상 점심을 먹고 나서 산책을 나가는데 그럴때마다 그가 아파트 단지에 줄지어 놓여져 있는 화단 앞에 우두커니 서있는 것을 보곤 한다. 그는 무언가를 측량하는 것 같기도 했으며 골똘히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가 그를 처음 발견한 것은 얼마 전의 일이었지만 그 이후로 오랜 시간을 마주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습은 나에게 무척이나 강렬하게 박혀 있었다. 그의 옷매무새며 얼굴 생김새, 독특하기 그지없는 행동거지와 높다란 키. 이 모든 것들이 판에 박힌 듯이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동네 주민들과 너무 다르게 느껴져서 생생하게 묘사해낼 수 있을 정도로 머릿 속에 깊숙이 남아 있었다.
나는 주로 집에서 점심을 해결하는데, 어제 먹다 남은 카레를 끓이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밥 위에 얹어서 싹싹 긁어먹는다. 그리고 통 안에 한가득 남아 있는 카레를 확인하고는 뚜껑을 닫아버리곤 지저분해진 접시와 수저를 싱크대에 집어넣는다. 이윽고 산책을 하고 와서 치우기로 마음먹었는데 이는 항상 자질구레한 일들은 뒤로 미루는 나의 몹쓸 성격 탓이다. 또한 행여나 놓칠 수 있는 그의 모습을 좀 더 오랫동안 자세하게 관찰하기 위함이었다. 혼자 사는 바람에 더더욱 집을 비울때면 문 단속에 신경을 기울이는 편인데 오늘은 깜빡하고 문을 열어두고 나온 것 같다. 하지만 설마 산책하는 그 짧은 시간 사이에 누군가가 내 집에 침입해서 무언가를 빼내갈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내가 너무 방심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겐 그것보다도 당장 그가 오늘도 여지없이 단지 어딘가에서 서성이고 있을 장면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보는 일이 중요했다.
그에겐 그렇게까지 나를 몰입시키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내가 그에게 이처럼 지극한 관심을 표하는 것은 참을 수 없이 내밀한 깊은 곳 어딘가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도대체 그의 정체가 무엇이며 그는 어떤 사람이길래 나를 이토록 안달하게 만들까. 난 항상 무언가에 빠지면 마치 놀이에 열중하는 어린 아이들처럼 앞만 보고 달리곤 했다. 다른건 염두에 두지 않았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걸 도저히 찾지 못하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직장을 관두고 사표를 책상에 내려놓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걸어나올때 뒤에서 들려온 차가운 목소리가 기억났다. 그래봤자 달라지는 건 없어.
나는 어느 순간부터 손목시계를 절대 차지 않는다. 그 갑갑함도 짜증날뿐더러 시계 초침이 쉴틈없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신경질이 치밀었기 때문이다. 방에 걸려있던 시계들도 죄다 처분해서 쓰레기통에 쳐박아넣었는데 그건 순전히 딱딱거리는 시곗소리가 듣기 싫어서였다. 그렇다고 현재를 완전히 잊어버릴 순 없었다. 두렵지만 수시로 시간을 확인하는 것 역시 나의 일과 속에 필수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이 몇 시인지 정확히 알아야 달콤한 맛의 카레가 쉬기 전에 꺼내어 맘껏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보통의 점심시간에 맞춰서. 또한, 얼른 촉박한 점심을 끝내고 그를 관찰하러 집 밖으로 걸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를 탐구하는 생활을 도저히 멈출 수 없다.
나의 유년기 시절의 모습은 언제나 같은 장면에 머물러 있다. 하늘로 날아가는 노란 풍선을 바라보면서 땅을 치면서 대성통곡하던 어느 날의 기억. 주변 사람들은 무척이나 당황스러워했고 어린 나는 다시는 손에 잡을 수 없는 풍선의 희미해지는 모습을 눈물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한번 지나가버린 과거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내 손을 떠난 풍선 역시 마찬가지란것을 깨닫기엔 그 때 나는 너무도 어렸다. 나는 아직도 그 당시 좋아했던 카레를 먹는다. 물론 어머니의 정성스러움이 그득 담겨 있는 그 때의 맛과는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내가 먹는 카레에선 어렸을 적의 낯익은 향기가 풍겨나온다.
그가 다시 걸음을 멈추자 나도 걸음을 멈춘다. 그는 가만히 화단의 길이를 재고 있다. 계산중일까. 무엇을 계산하고 있을까. 화단의 길이를? 대체 왜? 그에게 이러한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나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느닷없이 머리가 지끈거려서 소극적인 관찰을 지속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고보니 내일이 크리스마스 이브이다. 크리스마스 이브가 다가올수록 그가 아파트 단지 내에서 그 기묘한 행동을 하는 횟수가 잦아졌다. 눈으로 무언가를 확인하고 계산하고 측량하는 듯한 기묘한 행동 말이다. 그의 눈 뒤에는 길이를 잴 수 있는 줄 자라도 달려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도저히 그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었고, 그의 행동에서 어떠한 의미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저 거의 천에 가까운 가구가 밀집해 살고 있는 이 거대한 아파트 단지의 모든 화단에 대한 조사가 거의 끝나가고 있다는 것만을 알아차릴 수 있을 뿐이었다. 금새 날이 어두워졌고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도 그럴듯한 정보를 얻지 못한 것이 무척이나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나에게 그는 대체 어떤 의미일까. 나는 그에게서 내 인생의 어떤 모습을 반추하고 있는 것이길래 그토록 그에게 매달리는 것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는 왠지 나에게 내가 강렬히 바라고 있지만 전혀 의식조차 못하고 있는 무언가를 줄 것만 같았다.
직장을 관두고, 가족도 없고, 사회 속에 섞이기도 힘든 철저히 고립된 나의 모습. 나는 세상이 두려웠고 오직 내가 관심있어 하는 것은 먹다만 카레.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밥 위에 얹어 놓은 황갈색의 달디단 카레. 그리고 그를 관찰하는 것. 그리고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다. 나는 점심을 먹자마자 여지없이 그를 찾으러 집 밖으로 뛰쳐나갔지만 그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커다란 단지 안을 이잡듯이 뒤집고 다녔지만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체구의 그의 모습은 흔적조차 없었다. 그는 이제 이 곳을 떠나간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애초에 그는 내가 만들어낸 환영이나 신기루에 불과할 것 같다는 생각까지들었다. 그의 실체는 한겨울의 얼음밭에서 흐릿하게 어른거리는 빛의 잔상 같았다.
눈을 감으면 아직도 그가 화단을 따라서 천천히 걸어가며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모습이 선하다. 그러나 나는 왠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모습은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난 해가 완전히 저버리고 나서야 집 안으로 들어와서 문을 잠갔다. 문을 잠그는 찰칵 하는 소리가 귀에 또렷하게 들리자 비로소 안심했다. 어둠이 짙게 내려 앉은 바깥을 걸어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예상치 못한 손길이 어둠 속에서 땀으로 흥건해진 내 목덜미를 건드릴 것만 같은 두려움이 날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그런 나의 특이한 습성을 가지고 왁자지껄 떠들면서 놀려대곤 했다. 물론 그런 친구들과 만나지 않은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터였다.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이 집에서 완벽하게 홀로인 채였다.
베란다를 통해 바라본 바깥에선 이미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한창이었다. 한껏 멋을 낸 사람들이 아파트 현관에서 걸어나와서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다른 집 안에선 이미 멋들어지게 만들어놓은 크리스마스 트리가 휘황찬란하게 빛을 뽐내고 있었다. 트리나 여타 장신구들을 진즉에 사다놓는 것을 깜빡한지라 나는 어쩔수없이 베란다에 우두커니 서서 다른 사람들이 장식해놓은 불빛을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도 반짝거리는 집들을 응시하고 있다보니 나도 모르게 들뜨기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입으로는 어느새 낯익은 캐롤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이 캐롤의 제목도 정확한 가사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나는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음이 불분명한 멜로디를 읊조렸다.
텔레비전을 켜둔채 잠을 자는 것은 나에겐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주변이 너무 조용해지면 역시 어둠 속의 손길과도 같은 두려움이 날 찾아와 괴롭혀서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다. 나는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달라질 것 없는 일상을 마무리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깜빡하고 베란다 문을 잠가놓지 않은 것 같았지만 지금에 있어서 그건 아무런 상관도 없을 것 같았다. 베란다 문이 스르륵 열리고 누군가가 내 집 안에 들어온다고 해도 그가 가져갈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내 목숨을 제외하고는.
잠이 쉽사리 들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전날이라고 한껏 기대를 품고 잠 못 이루는 아이들마냥 나는 입술을 깨물면서 그 어느때보다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잠들기 위해서 마구 몸을 뒤척였지만 그럴때마다 들리는 부시럭거리는 마찰음이 내 귀를 날카롭게 자극했다. 텔레비전은 정규 프로가 모두 끝났는지 신호가 잡히지 않는다는 시퍼런 화면만이 가득했다. 이미 완벽히 잠들어버리기엔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최근 들어 한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대체 지금이 몇 시지?
텔레비전에서 뿜어져나오는 무미건조한 파란 불빛을 바라보며 어둠 속에서 가만히 누워있으니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아니, 정말로 시간이 멈춘 것이었다. 이미 집 안에는 모든 시계를 치워버려서 나는 시간을 확인할 수 없었다. 내 손목은 텅 비어있었고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시간이 멈춘 것이다. 크리스마스 이브와 크리스마스 사이 어딘가에서 나는 멈춰버린 것이다.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런 움직임도 감지되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온 몸이 굳어버려서 시간이 멈춘다면 이런 것이구나 하며 감탄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람 소리가 들렸다.
베란다 문을 열어놨으니 바람이 새어들어오는 것은 당연했다. 바람 소리는 더욱 거세어졌다. 폭풍이라도 불어오는 모양이었다. 나는 누운 상태로 고개를 들어서 베란다 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가 베란다 바깥에 서서 날 지그시 쳐다보는 것을 발견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달 빛을 등지고 있어서 어둠 속의 그림자처럼 서 있는 그의 눈빛은 시퍼런 텔레비전의 화면 만큼이나 시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그가 대체 저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화단 앞에서 그렇게 주변을 살펴보고 있던 것은 각 집의 위치를 확인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미칠 무렵에 그는 천천히 베란다의 문을 열었다. 베란다 문을 열자 그의 육중한 체구로도 다 막지 못한 차가운 겨울 바람이 마구 집 안으로 새어들어왔다. 그러나 나는 이상하게 그다지 춥지 않았다. 몸이 얼어붙어서 한 마디도 꺼낼 수 없었지만 나는 지금의 이 상황이 그렇게 두렵지는 않았다. 베란다 문이 낡아서 그런지 끼이익 하는 듣기 싫은 쇳소리를 내면서 그가 다 들어올정도로 환하게 열렸다. 그러나 그는 집 안으로 한 걸음도 들어오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멈춰서 흐르지 않고 한 자리에 머물러 있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잠깐 정신을 잃은 것 같았는데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온데간데 없었다. 베란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마치 이 모든 것이 꿈인것마냥 평상시와 다를바 없는 집 안의 모습은 날 약올리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정말 달라진 것이 없을까. 나는 이불을 젖히고 일어났다.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나도 모르게 전원이 꺼져있던 텔레비전을 다시 키니 새벽 방송이 나오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다. 지금은 크리스마스 아침이다. 오늘과 어제 사이에 있었던 일을 나는 무척이나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아! 내 시선이 베란다 문으로 다가갈 무렵 나는 어제와 완벽하게 다른 차이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닫혀진 베란다 문 사이에 무언가가 껴 있었다. 가느다란 실 같은 것이..나는 그 실을 잡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문은 놀랍게도 매끄럽게 어려움 없이 열렸다. 마치 지금 열릴 것을 미리 알고 있던 것처럼. 나는 실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고 내 손에서 떠나가지 않도록 꽉 쥐었다. 이내 나는 실이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지 알아차렸다. 노란 풍선이었다. 기억 속의 바로 그 노란 풍선이었다. 내가 잃어버렸던 바로 그 풍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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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 이후로 아파트 단지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려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가 서성이던 화단에는 눈이 쌓였고 이내 봄이 되어 새싹이 자라났고 풀이 무성해졌지만 그는 없었다. 나는 이제 그가 누구인지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더 이상 궁금해하거나 조급해하지 않는다. 그는 크리스마스와 가까워진 어느 시점이 되면 다시 이 곳으로 돌아와서 기묘한 탐색을 시작할 것이라는 걸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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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때 크리스마스를 주제로 처음 써본 글입니다. 오랜만에 예전 기억이 떠올라서 읽어봤는데 다시보니 조금 오글거리긴 하지만 나름 재밌는 구석이 있어서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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