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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의 소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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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및 단편소설

결별

Samesun 2021. 10. 23. 13:30


전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을 버려야 할 것 같습니다. 용납이 안 된다고 소리치면서 절 붙잡으려고 통사정을 한다고 한들 제 결심은 확고합니다. 어차피 이대로 가다간 저와 당신은 둘 다 무너질 수 밖에 없고, 서로를 원망하며 길바닥에서 서서히 바스라져 사라지는 낙엽처럼 이 추운 계절을 견디지 못하고 소멸될 것입니다. 어찌보면 이미 사용 기한이 지나버린 물건들을 한데 모으고 쓰레기봉투에 담아 버리는 것처럼 이는 너무나도 간단한 일입니다. 왜 그동안 우린 손쉽게 끝낼 수 있는 결말을 회피하려고만 했던 건지 의문이 듭니다. 그저 이러한 말을 서로에게 먼저 건네기가 두려웠던 걸까요. 하지만 생채기 하나 나지 않고 무사히 끝나는 관계란 없는 것 같습니다. 제멋대로 썰어놓은 고깃덩어리에서 배어나오는 핏물이 우리의 지나온 날들의 흔적을 닮았습니다. 서로에게 끝없는 상처를 입히고 입혀서 회복이 더디게 만들었던 날들 말입니다.

당신은 처음 날 보던 날에 나와 우리의 관계를 존중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지금에 와서야 그 약속이 무용하다는 걸 알았지만 때는 늦었습니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무가치할까요. 우리가 겪었던 그 모든 난잡한 일들이 맨 처음 마주쳤던 순간부터 예정되어 있던게 아닌가 싶습니다. 버스가 제 시간에 도착하지 않거나, 예매한 연극이 극장 사고로 인해 불가피하게 취소되었을때나, 주문이 잘못 들어가 엉뚱한 음식이 나올때나 당신의 신경이 곤두서는 걸 볼 수 있었는데 그 때부터 이미 예민한 기질을 충분히 갖고 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저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점차 당신의 말투와 행동은 거칠어져 갔습니다. 물론 당신은 매번 저에게 뜬금없이 화를 쏟아낼때마다 곧 평온을 되찾고선 일부러 저지른 행동은 아니었다고 변명했죠.

참으로 희한한 건 항상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일 없이 살다가도, 꼭 잘못을 저지를때엔 온 세상이 발벗고 나서서 도운 것마냥 무조건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간다구요. 회사에 출근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더더욱. 그 날도 이런 기묘한 법칙이 작동하는 날이었습니다. 그 날, 당신은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또 본인을 쓸데없이 일찍 일어나게 한 스스로의 성실함을 한탄하면서, 애꿎은 찻 잔의 커피스틱만 부단히 휘제꼈습니다. 뜨거운 커피에 입을 데이면서 당신은 하루종일 쏟아질 수많은 보고와 요청자료를 상상하면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그건 분노에 가까운 감정이었을까요? 아니면 다가올 상황들에 대해 지레 겁을 먹었던걸까요? 이제와선 도저히 알아낼 방법이 없습니다. 여튼 당신은 아무도 모르게 속으로 비명을 질러대며 천천히 모니터 앞으로 향했습니다. 지긋지긋하게 여러번 입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잠깐만 돌아서면 금새 잊어버리는 당신의 사번과 비밀번호를 로그인창에 우겨넣었죠. 사내 인트라넷에 접속하고 밤새 도달한 업무 메일들을 확인하면서 당신의 퀭한 눈이 금방이라도 꺼질듯이 희미하게 번쩍였습니다. 메시지의 발신인도 확인하지 않고 당신은 벌겋게 피어오른 알람들을 지워나갔습니다. 매사 불만이 가득한 상사가 먼저 말을 걸었는지, 혹은 당신이 먼저 말을 내뱉었는지. 하여간 오전 미팅이 느닷없이 진행되었고, 당신은 좁아터진 회의실에서 어항에 갇혀 동동거리는 물고기를 떠올렸습니다. 동동거린다는 표현은 잘못된 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물고기는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는 공간이 어항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길지도 모르니깐요. 반면에, 당신이 입사 이후 벗어나지 않기로 정해놓은 경계선에서 서서히 균열을 느낀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입니다.

그건 대부분의 술자리가 파할 시간이 되어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지하철이 꽉 막힐 정도로 늦게까지 야근을 하면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 잡았을 때였을까요. 아니면 밤새 준비한 보고가 단 몇 초만에 파쇄기에 들어간 것처럼 상사의 손 위에서 산산조각이 나버려 깊은 허무에 잠겼을 때였을까요. 아니면 조심스럽게 이번주 휴가계획을 올리고 잠깐의 기대감을 품은 것도 잠시, 당장 다음주까지 처리해야 한다며 없던 일을 만드는 상사에게 거역할 수 없을 때였을까요. 아니면 바쁘게 굴러가는 격무 탓에 종일 전전긍긍하며 피폐해진 마음을 그나마 쓸어내릴 수 있는 출퇴근길의 지하철에서 문자로 업무 지시를 받았을 때였을까요. 아니면..

하지만 당신이 이런 저런 이유로 변했다고 해서 그게 그동안 저에게 한 행동의 변명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저 처음부터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고, 회사는 그 변화를 추동했을 뿐입니다. 누구나 각자의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고 당신이라고 특별히 더 힘든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당신에겐 지금 느끼는 고통이 전부였습니다. 다른 모든 시야가 차단될 정도로. 인내심을 소진해버린 와중에 만만한 대상은 저 뿐이었습니다. 저는 사무실의 소란스러운 풍경이라든가 짜증을 유발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품고 있는 동료들이라든가 숨이 막힐 정도로 많고 복잡한 업무들이라든가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저 당신이 종일 정신없이 키보드를 두들기다가 분에 못이겨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다가오는 누군가에게 험악하게 욕설을 내뱉었고, 분화한지 시일이 지난 화산처럼 여기저기 검은 재를 흩뿌렸다는 것만 압니다. 그리고 사무실을 뛰쳐나와 거리를 배회하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찾아간 저에게 저주 가득한 하소연을 퍼부었죠. 애꿎은 제 탓을 하면서 미쳐 날뛰는 당신을 감당하는 건 오로지 제 역할이었습니다. 황당한 일은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결국 급하게 써내려간 사직서를 제출했고, 얼마 안되는 금액의 퇴직금을 챙겨서 집에 틀어박히고 말았습니다. 흔히 말하는 번아웃을 이유로 들먹이면서 말입니다.

원래부터 예민한 기질을 품고 있었다고 한들 굳이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행동했어야 했을까요. 차라리 그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무급 연차라도 쓰고 얼마간 쉬기라도 했다면 다른 결말이 기다리고 있진 않았을까요. 물론 당신은 그정도로 쉽게 풀리지 않을 정도로 이미 심사가 단단히 꼬여있었습니다. 누적된 피로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처럼, 이미 평온한 모습은 고단한 나날을 거치면서 서서히 풍화되어 한 줌 먼지로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전 걱정에 가득차서 찾아갈때마다 저와 세상을 향해 윽박지르던 당신의 행동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저도 그런 당신에게 입에 담지 말아야 할 날카로운 말들을 내뱉곤 했었죠. 우린 그렇게 서로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장면들을 하나씩 잃어갔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가장 원망스럽게 느껴지는 모순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이젠 더 이상 이런 비극에 몸을 맡기고 싶지 않습니다. 망가져버린 당신과 연관된 모든 괴로운 생각을 마치고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간만에 깊은 잠에 빠져들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좀 더 욕심을 내본다면, 당신이 오래전 우리가 처음 만난 시절 이전으로 돌아가서 삶의 여유를 다시금 회복할 수 있길 바랍니다. 그래서 더 이상 우울과 분노처럼 자신과 주변 모두를 해치는 감정에 시달리지 않고 묵묵히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들처럼 일상을 견뎌낼 수 있길. 제 소망은 그런 평범하지만 이루어지기 어려운 일들뿐입니다. 비록 당신의 총명한 눈빛은 불꺼진 전등 아래 캄캄한 어둠에 침식되고 말았지만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고통이 서서히 씻겨나간 자리에서 다시 타오를 수 있을 거라고 믿어봅니다. 저 역시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회복할 순 없겠지만, 정상적인 삶을 이어나가도록 부단히 애쓸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서로를 보면서 웃을 수 있었던 시절, 잔잔한 푸른 빛의 바다 앞에서 약속했던 미래는 이제 각자의 몫으로 남길 때입니다. 그 당시의 편안하리만치 잦아든 파도 앞에서 느꼈던 고요한 적막은 영영 잊기 어려울 것입니다. 앞으로 이런 구구절절한 편지는 쓰지 않겠습니다. 부디 당신이 제가 오래전 반할 수 밖에 없었던 그 환한 미소를 되찾을 수 있길 바랍니다. 이만 두서없이 써내려간 글을 마칩니다.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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