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의 소설방
오래된 장소 본문

어떤 장소에 대한 기억이 있다. 문턱을 넘고 안으로 들어서면 좁다란 공간 안에 정겨운 낡은 종이 냄새와 다채로운 색감이 존재하는 그 곳. 나의 어린 시절 한 켠을 차지했던 단순하지만 그래서 더 명료하게 빛을 내는 기억들이 가득했던 그 곳. 동네 공원 어귀에 내가 종종 방문하던 헌 책방이 있었다. 읽다가 흥미가 떨어진 책을 팔거나 혹은 무질서로 나열된 서가 사이에서 예상치 못한 자극을 줄 책을 얻고 싶을 때 찾아가곤 했다. 철학류의 도서를 전문으로 하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소크라테스 책방이라는 이름의 간판을 달았던 곳이었다.
주인이 원하는 날에만 간헐적으로 운영하곤 했으며, 열린 문 사이로 들어가면 활기가 넘치게 인사를 건네는 한 중년의 남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는 원래부터 서점을 열 생각은 아니었다고 한다. 나름 주변인들 사이에서 알아주는 유별난 책 수집광이었는데, 한 두 권씩 쌓여가던 책들이 너무 많아져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자 그나마 무거운 책더미도 털썩털썩 들 힘이 남아 있을 시기에 서점을 열자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인테리어 공사 등에 큰 돈을 들이지 않은 탓에 어딘가 투박하고 촌스러운 가게 내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게를 무척이나 소중하게 여겼다. 책들 위에 소복하게 쌓여가는 먼지들을 훌훌 털어가며 그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서가 정리를 하는 걸로 종일을 보냈다. 나가는 책보다 그가 여기저기에서 새롭게 들여놓는 책들이 더 많아서 아무런 맥락없이 쌓여 있는 책더미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영원히 팽창하고 있을 것만 같은 이 오래된 세계는 이제까지 그가 살아왔던 인생의 총집합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그런 그가 꾸며놓은 세계에 잠시 머물다 가는 손님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이 많은 책을 구하기 위해 얼마의 자산이 소모되었을지, 값어치가 꽤나 나가는 고서적이 숨겨져 있을지와 같은 궁색한 질문에 매달리기보다는 눈 앞에 놓여 있는 책의 파도에 아무 생각 없이 몸을 맡기는 것이 더 좋았다. 마치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여행을 떠나듯, 나는 빼곡하게 책이 꽂혀 있는 서가 사이를 왕래하면서 뜻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각종 서적들을 들여다보았다. 어쩌면 돈 걱정이 상대적으로 덜했던 어린 시절에서나 가능했을법한 순수한 유랑이었다. 그 당시의 아버지는 나에게 책을 사는 용도라면 아낌없이 쓰라며 용돈을 주시곤 했는데 난 무턱대고 고전 문학 전집을 한 권씩 사모으기로 결심했다. 그 당시엔 요즘처럼 인터넷으로 관련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없었기에 이름도 모르는 작가들의 책을 오로지 흥미를 끄는 제목만으로 선택하곤 했다. 파리대왕이나 호밀밭의 파수꾼을 제일 먼저 고른 것도 그런 이유였다.
난 그렇다고 진지한 독서광은 아니었는데 막상 고심 끝에 사들인 책을 내 방 책장 안에 쌓아두고는 제대로 꺼내 읽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집에 놀러온 친구들이 내 책장을 보고 이 많은 책을 다 읽었냐고 놀랄때마다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해 민망할 정도였다. 어쩌면 난 책방의 세계를 탐험할때마다 기념품을 하나씩 얻어 오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러나 점차 세월이 흐르면서 고전 문학을 사모으는 일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졌고, 자연스럽게 난 그 곳에 발길을 끊었다. 그렇게 나이가 더 들어서 난 책을 예전처럼 좋아하진 않았지만 이따금씩 책장에 진열되어 있는 낡은 책들의 표지를 손으로 훑으면서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러다 맑은 하늘에 이상하게 거센 소나기가 내리던 날, 예전 기억이 떠올라 찾아간 공원 어귀엔 철제 문이 굳게 닫혀 있고 사람의 손길이 한참 닿지 않은 듯한 그 곳이 있었다. 거미줄이 잔뜩 쳐져 있어서 문 틈 사이를 확인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은 황폐해진 모습이었다. 그 뒤로 몇 번을 더 찾아갔지만 다시 간판에 불이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소크라테스 책방의 주인은 드디어 그 자신을 알기 위한 긴 여정을 마치기로 했을지도 모른다.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치면서 종이가 닳고 군데군데 상처가 날 정도로 모진 세월을 견뎌온 책들과 함께 그는 평생을 매달려온 질문에 대한 해답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떠나버린 걸까. 매번 아낌없이 웃으면서 나를 반기던 그의 얼굴에서 느껴지던 환한 기운이 여전히 생생했다. 아직 생의 정 가운데를 도달하려면 수없이 많은 날이 남아 있는 창창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인간의 실존에 대한 묵직한 고민과 깊은 허무를 다룬 소설들을 턱턱 들고오는 어린 손님을 그는 기억하고 있을까. 내 기억이 맞다면, 그는 언제나 손님에게 직접 책을 권하지 않았다. 덕분에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걸 찾는 데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차례차례 쌓여 온 책들에서 나는 과거의 내 모습들을 비추어본다. 비록 책방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지만, 여전히 내 방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그 오래된 장소의 흔적을 살펴보면서 그 곳에서 보냈던 시절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왔는가를 새삼스럽게 되짚어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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