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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의 소설방

퇴근하지 못한 자, 모두 유죄 본문

에세이 및 단편소설

퇴근하지 못한 자, 모두 유죄

Samesun 2021. 10. 27. 18:56


방역 나왔습니다. 작업복을 입은 다부진 체격의 남자가 사무실에 느닷없이 등장했다. 우렁찬 그의 외침에 놀란 나는 상황 파악을 위해 서둘러 주변을 돌아보았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퇴근하고 얼마 안되는 사람들만이 남아서 야근 중인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저녁이었다.

군데군데 조명이 꺼져 있어 스산해보이는 사무실에서 사람들이 파티션 너머로 검은 얼굴을 불쑥 불쑥 내밀었다. 예기치 않은 방문객의 낯선 실루엣에 다들 당황한 채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모두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그는 아랑곳않고 묵묵히 퇴거를 요청했다. 사무실 전체 방역을 위해서 남아 있는 직원들 모두 얼마동안 자리를 비워주어야한다는 것이다. 이런 통보를 처음 들었던터라 다들 벙찐 상태로 서로 눈치만 살피며 애꿎은 마우스만 딸깍거렸다. 그는 서둘러 불쌍한 직원들을 향해 컴퓨터를 끄고 사무실에서 나가줘야 한다고 재촉했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어쩔 수 없이 얼굴이 새카매질때까지 일을 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제서야 자신들이 그나마 앉아 있을 수 있었던 작은 공간의 소중함을 미약하게나마 느꼈다. 당장 여길 벗어나면 갈 곳은 딱히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몇몇은 당장 급하게 처리해야 할 업무들도 산적해있던터라 철저하게 지켜지는 방역 지침이 그날따라 유난스럽게만 여겨질 정도였다. 노동시간에 대한 근로기준법은 코로나 시국의 갈팡질팡하는 그 거리두기 방침에 비하면 너무도 얄팍한 보호를 받고 있었다.

어차피 방역을 하든 안하든 사무실에 갇혀서 종일 일하고 있는 와중에 이런다고 효과가 있긴 한 것이냐, 왜 하필 바빠죽겠는 오늘 저녁에 하는 것이냐, 사장님 보고가 당장 시급해서 어쩔 수 없다 등등 에둘러 변명을 하려고 해도 엄격하기 짝이 없는 자태를 하고 직원들을 여기서 몰아내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그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애시당초 우리의 보잘것없는 일보다도 더 중요한 건 회사가 얼마나 당국의 지침을 잘 따르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었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들보다 이 곳에서 불필요한 존재들이 없었다. 항상 주인의식을 갖고 일할 것을 강조하는 회사의 창립 정신이 무색할만큼 원래 이 곳의 소위 주인들과 밤의 불청객은 삽시간에 그 위치를 달리했다. 반면에, 대체 무엇을 소탕하기 위해서 벌어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갑작스레 시작된 방역은 대부분의 업무들이 또 다른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이 곳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었다. 난 큰 고민 없이 꾸려진 전시회장의 구태의연한 작품 한 점에다 사무실을 그려넣는 상상을 하며 코를 긁적거렸다. 실내에서 종일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그런지 밤이 되면 코나 입 주위가 간질간질했다. 차라리 간지러움 정도면 참아볼만 하겠는데 화장실에서 거울을 볼때마다 늘어나는 뾰루지 수는 꽤나 거슬렸다. 난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처음엔 거세게 반발하던 사람들도 이내 옹졸한 소시민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꽉 쥐고 있던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이윽고 키보드나 마우스 위에 끈적거리는 땀 자국만이 남았다. 야심한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저녁을 굶고 일하고 있던 난 때늦은 식사라는 또 다른 핑계를 들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사무실을 벗어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피시를 끄지 않은 것이 기억났지만 다시 돌아가도 좋을지 확신이 없었다. 다음 방역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면 직원 퇴거 조치는 이미 종료된 순서였다. 불꺼진 건물 로비를 걸어가면서 옆구리가 뻑뻑해지는 걸 느꼈다. 굳어진 자세를 항시 유지하면서 몸을 제때 풀어주지 않은 탓이었다. 야근과 그로 인한 운동부족에 시달리다 보면 코로나만 안걸렸을뿐 심신은 이미 건강한 상태와는 거리가 멀어져만 갔다. 커다란 유리로 되어 있는 회전문을 열고 스산한 거리의 불빛에 몸을 맡겼다. 막상 회사를 뛰쳐나와도 달리 갈 곳은 없었다. 엥간한 식당들은 초저녁에 문을 다 닫았고, 열려 있는건 24시간 편의점이었는데 오늘따라 인스턴트 제품들이 구미에 당기지 않았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주변을 배회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차라리 이대로 퇴근해버리면 좋지 않을까 하는 망설임도 들었지만 그보다 현실에 대한 압박이 더 컸다. 당장 내일 아침까지 프로젝트 진행사항을 정리해서 보고하라는 불호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마음은 급했지만 방역은 언제 끝이 날지 몰랐고, 누구 하나 나에게 종결 시간을 알려줄 이도 없었다. 결국 난 이도 저도 하지 못하고 귀가에 대한 갈망과 내일에 대한 고민들이 점점이 흩뿌려진 밤길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아직도 창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건물들은 꽤나 많았다. 저들 역시 나처럼 원치 않은 유랑자의 신세가 되어 어두컴컴한 골목 사이를 걷고 있을까. 그런 사람 한 명이라도 마주친다면 우린 서로를 반가워할까 아니면 정곡을 찔린 듯 마음이 불편해져 서둘러 모습을 감출까. 어쩌면 우린 모두 전생에 저지른 알 수 없는 죄목으로 인해 이렇게 벌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스운 생각마저 들었지만 어디에 하소연할 곳도 없었기에 끝끝내 속으로 삼키고 말았다. 발이 조금씩 아파왔다. 어느덧 회사 건물 앞으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좀전까지 내가 있었던 사무실이라고 추정되는 유리창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직 아무런 징후도 느껴지지 않는다. 불은 여전히 켜져 있고, 사람인지 사물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의 그림자가 조금씩 일렁거린다. 소독이 완료된 사무실에 내가 들어가면 다시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버려 사실상 달라지는 건 크게 없을 것이다. 서늘한 밤 공기에 몸은 남아 있던 온기를 마저 반납했다. 우두커니 서서 망연하게 창문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한 두명씩 보이는 듯도 했다. 언제쯤 끝이 날까. 우리의 이 지겨운 형벌은. 난 흘러내리는 마스크를 고쳐 쓰고 코를 긁적거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 말고는 없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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