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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의 소설방

아직 완전히 늦지 않은 본문

에세이 및 단편소설

아직 완전히 늦지 않은

Samesun 2021. 10. 14. 21:16


도시락이 푹 젖어버려서 먹기 영 찝찝하네. 천둥이 요란하게 내리칠 정도로 갑자기 폭우가 내린 날이었다. 과장과 난 편의점 도시락으로 간단히 점심을 때우기로 했다. 회의실에 마주 앉아 소스인지 빗물인지에 적셔진 축축한 돈가스를 입에 우겨넣으며 과장은 연신 고개를 저었다. 나이들수록 돈이 잘 안 모이는 것 같아. 애들은 금방 자라고. 중학교 올라가면 학원비도 더 오른다고 하던데. 그동안 담아 놓았던 속내를 담담하게 털어놓는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점점 커져가는 빗소리에 감춰져 조그마한 이 곳 회의실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였다. 천둥이 요란하게 칠 때 마다 그의 푸념이 거친 폭음 사이로 사그러들었다. 실로 단촐한 식사를 하면서 동시에 궁색한 생활 걱정이라니. 무거운 마음이 들어 나는 꾸역꾸역 한 마디를 보탰다.

그래도 아이들이 건강한게 어딥니까. 요즘 같이 병원가기 무서운 시대에. 날이 무딘 플라스틱 포크 탓에 비엔나 소세지가 잘 집히지 않아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과장은 김이 빠지는 듯한 한숨 소리를 내며 밥알을 톡톡 건드렸다. 젓가락질이 서툰 건 나와 별 차이가 없었다. 애들이 더 크면 나랑 안 놀아줄걸 생각하면 이렇게 돈버는게 무슨 의미인가 싶어. 요샌 중학교만 입학해도 아빠랑 데면데면해진다고 하더라고. 그렇다고 때려치고 놀자니 하루가 멀다하고 치솟는 물가가 두렵고. 무조건 일을 계속 하는 게 아무래도 현실적으로 맞으니까. 그런데 또 이런 와중에도 주말 평일에 구애 받지 않고 애들과 종일 같이 있는 꿈을 꾸고 있는 걸 보면 난 아직도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구분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 같아. 다른 사람이 보면 고장난 저울에 어떻게든 무게를 재보려 안간힘을 쓰는 바보나 다름없을거야. 이해 못한다고 비웃을 수도 있지. 원래 애들은 그렇게 멀리서 바라보는 걸로 만족하면서 키우는 거 아니야? 라고 하면서.

과장님, 누구나 그렇게 말은 할 수 있죠. 다만 아직 자기가 뭘 원하는지 정확히 모르고 있을 뿐인 것 같아요. 떨어지는 비를 머리에 맞고 나서야 우산이 찢어진 걸 아는 것처럼. 나는 세상을 파괴할 기세로 울려 퍼지는 천둥을 핑계로 적당히 그의 말을 맞받아치면서 대화의 간격을 조절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난 그의 감정에 동화되는걸 느꼈다. 당장 가정을 꾸려본 적 없는 나로서는 아이들과의 추억처럼 그 때가 아니면 다시는 얻지 못할 정도로 소중한 순간들을 잃고 있는 건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그의 현실에서 나에게 다가올 미래를 엿보았기 때문일까. 어쩌면 나 역시 흐르는 빗물에 큰 저항없이 떠내려가느라 나에게 귀중한 다른 것들을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한껏 불어나서 맹렬한 기세로 밀려드는 물살을 온 몸으로 받아쳐 낼 자신은 없었다. 언제나 몰아치는 현실은 나보다 크다고 느껴졌기에.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처음부터 한 몸이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서로 꽉 달라붙어 있는 나물들을 입에 통째로 집어넣었다. 굳이 영양 성분표를 살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수준의 형편없는 식단 탓인지 왠지 모르게 음식을 섭취하고 있는데도 되려 기운이 떨어졌다. 오후를 버티기 위해선 턱 없이 부족한 느낌이었지만 수저를 멈추는 사람은 없었다. 습기에 절여져서 영 쓰기에 마땅치 않은 무기라도 없는 것 보다는 나았으니. 이윽고 과장이 조금은 생기가 감도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주말엔 다같이 캠핑을 가기로 했어. 앞으로 얼마나 남았을진 모르지만 그래도 한 번은 더 놀아줄 수 있어서 다행이야. 그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맺히는 게 보였다. 입맛이 갑자기 좋아진 듯 그의 수저가 더 힘차게 움직이는 것도.

밑창으로 새어들어온 빗물에 흥건하게 젖은 구두를 신고 반복된 출퇴근 사이에서 숨죽여 보낸 하루들이 그 한 번의 캠핑으로 조금은 보상받을 수 있길. 언제 그랬냐는 듯 궂었던 날이 환하게 개이고, 마른 땅 바닥이 훤히 드러나서, 인생의 남아있는 날들 가운데 결코 덜어낼 수 없는 시간을 보낼 수 있길 그는 바라고 있었다. 그가 강풍과 폭우에 더럽혀져 절반 가까이 날아간 도시락을 견디면서도 속으로 외치는 소망이 나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내가 바라는 것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는 여전히 강렬하게 쏟아지고 있었지만 귀가 이제 적응이 된 듯 남은 식사 동안은 큰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휴식 시간을 좀 더 귀중하게 보내기 위해 우린 말을 아끼고 먹는 데에 집중했다. 식후에 조금이라도 잠을 자둬야 길고 긴 오후를 버틸 수 있었다.

이윽고 어두운 회의실 안에서 들리는 건 오물거리는 씹는 소리, 땅으로 사정없이 곤두박질치는 빗소리, 이따금씩 회의실을 휘청거리게 할 정도의 진동을 동반하는 거센 천둥 소리, 그리고 그 사이사이 들릴듯 말듯 들려오는, 지금쯤 어딘가에서 부푼 기대를 안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달래고 있을 아이들의 속닥거리는 웃음소리였다. 아직 완전히 늦지 않은, 희망이라고 부를 만한 순간들이 비를 뚫고 다가오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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