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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의 소설방

Dear my _ 본문

에세이 및 단편소설

Dear my _

Samesun 2021. 10. 13. 08:06


나는 당신을 기억하는 사람 중의 한 명입니다. 잘 지내시나요. 물론 당신을 기억하는 이가 그리 많지 않을지 모릅니다. 오래전의 당신과 같은 공간을 향유하던 축복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을테니까요.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의 얼굴에 의구심이 살짝 비치는 등 여러 개의 묘한 표정이 스칠테지만, 전 감히 상상하건데 그 어떤 당신의 얼굴 조차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을 겁니다. 저는 해가 저물기 직전 연하게 땅을 덮어가는 어둠 속에서 당신을 떠올립니다. 지평선처럼 경계의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길고 긴 선이 늘상 가늘게 뜬 눈을 하고 날 쳐다보던 당신을 닮았기에 그렇습니다.

언젠가 당신과 시간을 함께 보내던 재즈 바 앞을 지나친 적이 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단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던 대학가의 그 곳은 여전히 발길을 이끌게 만드는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유달리 복슬거리는 털을 가진 강아지가 반쯤 잠이 덜 깬 상태로 손님들을 마주하던 그 곳에서 당신이 늘 앉았던 자리는 아직도 내 기억 한 켠에서 까맣게 빛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알바를 전전하며 간신히 학자금을 갚아가던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주식 투자를 도모하던 동아리에서 우연히 만났지만 정작 한번도 투자와 관련된 서로의 의견을 공유하지 않았습니다. 정기적인 모임 이후 뒤풀이로 방문했던 이 곳 바에서 우린 같은 조에 배정되었다는 이유로 나란히 앉을 수 있었는데 다른 학우들과는 전혀 섞일 수 없는 내용을 주제로 얘기하곤 했습니다. 유난히 유쾌하게 나와의 대화에 임하던 당신은 애시당초 동아리에 오게 된 목적이 흔히 사람들이 갈망하는 자본 증식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과 마음이 통하는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에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당신의 핸드폰에는 투자를 위한 그 어떤 기능도 깔려 있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물론 당신은 한달에 한 번을 마주하는 그 풋내기들의 이상하리만치 진지한 모임 속에서 큰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나와 입이 마르도록 떠들던 고전 소설의 위대함에 대한 예찬이나 그에 반해 상대적으로 폄하하곤 했던 젊은 기성 작가들에 대한 섣부른 비판들도 그저 지극히 찰나의 여흥에 불과했을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에겐 한 두 계절 정도는 적당한 사이에서 만남을 지속해볼법한, 하루 아침에 떠나보내기엔 조금 아쉬운 말동무가 나였길 바랍니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 아쉬움을 전혀 남기지 않을 정도로 자유분방한 당신이라면 내가 왜 이런 소망을 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도 당신은 고집이 무척이나 강해서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주장에 관해선 철두철미하게 방어하는 편이라서, 밤을 새울 각오를 하지 않고선 거기에 덤벼들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 유독 기억이 납니다. 나름 이성적인 판단에 있어서 남들에 비해 뒤쳐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저였지만 당신을 논파하는건 몹시 고되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몇 번의 거친 소란을 겪은 후에야 나는 당신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는 결론을 내렸으니 말입니다. 때론 당신이 목소리를 높이고 얼굴을 붉힐 정도로 논쟁이 과열되곤 했는데, 이제와 돌이켜보면 그 모든 광경이 지적 유희로 포장되어 지금은 애틋한 인상으로만 남아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얘기를 끌고 가야 직성이 풀리는 당신은 다른 학우들에게 무척 이기적인 언행을 일삼는 사람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소지가 충분했습니다. 물론 어떠한 부정적인 평판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의 대화를 언제나 연장선상에 두길 원했습니다. 모든 굵고 얕은 사이가 그러하듯, 다음 차례에 다가올 피할 수 없는 이별을 난 최대한 머나먼 미래의 사건으로 미루고 싶었습니다. 이따금씩 당신은 금방이라도 온 몸이 투명해져서 사라질 것처럼 굴었고, 그럼 난 마치 익사를 목전에 둔 것처럼 간절한 심정이 되어 서둘러 뻐끔뻐끔 입을 열어 대화에 숨을 불어 넣곤 했습니다.

이처럼 관계에 있어 위협적인 당신이었지만 당신과 함께한 나날들이 향수 어린 추억으로 미화가 되었건, 그로 인해 불쾌한 순간들마저 지워지게 되었건, 실로 그리운 것은 사실입니다. 당신은 청춘이 상징하는 낭만과 자유를 몸소 실현시키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런 당신에게 동화되어 여러 밤들을 피로한 현실의 무게에 짓눌리는 일 없이 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제가 그리운 것은 당신이라는 사람과 거의 동일한 수준에서 하염없이 이야기를 끌어나갈 수 있었던 과거의 나 자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 전 두려울 것은 오로지 밤이 끝나가는 것 외에는 없었습니다. 생각이 사무실의 두꺼운 통유리 안으로 들어온 햇살처럼 갇혀버리는 지금의 신세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영감이 무섭게 타오르는 욕망을 앞서가던, 치기어린 그 시절의 나를 당신만큼이나 다시 보고 싶은 불손한 마음뿐입니다. 당신은 종종 시선을 눈 앞의 술잔에 비쳐 일렁거리는 내가 아닌 미지의 세계 어딘가에 두었고 과거의 모든 관습들에서 의도적으로 벗어나는 것을 숙명으로 삼은 사람 같았습니다. 그런 당신이 다른 평범한 인연들이 끝을 고할 때처럼 손을 흔들거나 서로의 앞날을 응원하는 가벼운 말을 하는 등 작별 인사를 나누는 방식으로 마지막 모습을 남기지 않았다는 건 우리의 엉뚱한 첫 시작을 생각해보면 당연하게 정해진 수순인지도 모릅니다.

그 당시 배경이 되어준 재즈 음악의 존재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그 바에서 이제서야 즉흥적으로 흘러가는 사치스러울 정도로 흥겨운 곡조에 귀를 기울입니다. 바텐더는 수십 번의 계절을 돌아서 찾아온 오래된 단골 손님을 끝끝내 알아차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만큼 짧았지만 수도 없이 머릿속에서 같은 테이크를 반복했던 우리의 만남이 당신에게도 그동안 살면서 써내려온 악보의 음계 어딘가에 하나의 쉼표로서 기록되고 있길 바랍니다. 이만 마칩니다. 항상 어딘가에서 내가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미래를 꿈꾸며 살아가고 있길. 친애하는 나의 _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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