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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의 소설방

군데군데 얼룩이 묻어 있는 흰 종이를 한참동안이나 들여다보았지만, 애시당초 무엇을 쓰려고 했던 건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억지로 결이 맞지 않는 단어들을 조합해내서 간신히 덧칠을 해가면서 의미를 부여하는 그런 심정이었다. 과감하게 그어놓은 일정한 선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답답한 대화 속에서 난 체념 가득한 눈을 하고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얼핏 보면 무례하기 그지없는 한숨이 내 입에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와 볼륨으로 흘러나와 마주한 상대방의 얼굴 위로 한가득 쏟아져내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표정은 한참 전부터 일정하다. 어딘가 얼이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살짝 분노가 서려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아이스 라떼를 시켜도 무방했을 정도로 차갑게 식어 있는 커피잔을..

번아웃이 온 상태여서 여러모로 글을 쓰기 힘들어진 요즘.. 쓰기보단 읽기가 편하다는 핑계로 꾸준히 책을 읽고 있습니다. 모든 에너지가 책에서 나온다고 믿어봅니다. 하루빨리 제 기운이 회복되길.

- 21년 한 해 동안 읽은 책 정리 총 읽은 책 : 54권 (연초 목표 100권 읽기 실패!) 총 읽은 페이지 : 16,615장 별점 다섯개 준 책 (완전 주관적) : 11권 (20.3%) 별점 네개 준 책 (역시 주관적) : 22권 (40.7%) - 21년 한 해 동안 읽은 책 부문별 정리 문학 49권 / 비문학 5권 (대부분 문학 중심 독서) 문학 : 소설 41권 / 에세이 7권 / 시집 1권 비문학 : 경영경제 2권 / 글쓰기 작법 2권 / 과학 1권 - 월별 독서 정리 가장 많이 읽은 달 : 1위_2월 (13권), 2위_3월 (9권), 3위_12월(9권) -> 주로 겨울에 독서를 몰아서 하고, 여름은 거의 책태기에 빠진듯 책을 거의 읽지 않은걸 알 수 있음 월 평균 4.5권 독서 : 다음 연말정..

어느덧 저녁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퇴근을 앞둔 시각이 되었다. 겨울이면 해가 빨리 지는 탓에 짙게 깔린 어둠이 귀갓길의 말동무가 되어주곤 했다. 혼자서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보면 발걸음이 멎기 전까지 시간의 흐름을 전혀 느끼지 못할 수도 있었다. 매번 그랬듯이 퇴근 시간이 되면 피시를 끄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사무실을 득달같이 벗어날 것이다. 올해의 마지막 하루를 어떤 내용으로 기록해야 할지 고민해보았는데 역시나 특별하게 다른 이야기는 없었다. 아침에 사무실에 오자마자 공복 상태의 커피를 마시고, 점심으로 간단하게 컵라면과 김밥으로 끼니를 때운 것을 보면 더더욱 색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자기복제에 머무른다는 평을 들은지언정 억지로 현실에 어울리지도 않는 무언가를 창조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밤을 통과해 지나간다는 표현은 얼핏 상투적이고, 뻔해보이지만 유독 마음에 쓰였다. 밤을 다룬 여타의 표현들도 마찬가지로 내가 좋아하는 문장 리스트에 꼭 포함되었다. 밤이 가지고 있는 환상적이면서 아름다운 이미지들이 언제부터 내 정서 속에 깃들어 있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난 기억이 가물한 어린 시절부터 밤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제목의 책들을 장바구니의 우선 순위로 올리곤 했다. 그 어떤 분야의 책이라도 상관없었다. 그저 밤이라는 글자가 촘촘하게 박혀서 흔들리지 않고 붙어있기만 한다면 난 과감하게 그 책을 서가에서 꺼내들었다. 사람의 기호를 관장하는 뇌의 특정 구역이 있다면 거기 어딘가에 밤이라는 인장이 굳게 찍혀 있을 것이 분명했다. 평생을 걸쳐 수집한 탓에 밤이 등장하는 책들이 서재 곳곳에 중구난..

크리스마스가 다가올수록 그가 단지 곳곳에서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이 더욱 자주 목격되었다. 나는 항상 점심을 먹고 나서 산책을 나가는데 그럴때마다 그가 아파트 단지에 줄지어 놓여져 있는 화단 앞에 우두커니 서있는 것을 보곤 한다. 그는 무언가를 측량하는 것 같기도 했으며 골똘히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가 그를 처음 발견한 것은 얼마 전의 일이었지만 그 이후로 오랜 시간을 마주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습은 나에게 무척이나 강렬하게 박혀 있었다. 그의 옷매무새며 얼굴 생김새, 독특하기 그지없는 행동거지와 높다란 키. 이 모든 것들이 판에 박힌 듯이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동네 주민들과 너무 다르게 느껴져서 생생하게 묘사해낼 수 있을 정도로 머릿 속에 깊숙이 남아 있었다. 나는 주로 집..

지금, 그는 업무를 마쳤을 것이다. 그리고 모니터 전원에 손가락을 갖다대려는 찰나, 팀원 전원 회의실로 집합하라는 전언이 들려올테고, 그는 기념일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약소한 선물 조차 준비하지 못한 가난뱅이 남편의 심정이 되어 쓰다만 보고를 들고 터덜터덜 걸음을 옮길 것이다. 당연히 완성이 되고도 남았을 시각이라고 외치는 팀장의 혹독한 추궁 앞에서 그는 시간의 상대성 이론이 본인의 인생을 토대로 증명되었음을 느낀다. 아니, 느낄지 모른다. 이미 피복이 벗겨져 시커멓게 타버린 전선들로 간신히 이어져 있는 전류처럼 그의 감정 또한 희미하게 전달되고 있을 터였다. 그의 귀 안에 자리하고 있는 널따란 평원에는 좀전부터 주먹만한 눈이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하얀 눈은 스폰지처럼 모든 외부의 소리를 삼켜버렸다..

당신의 호불호는 안녕하십니까. 진한 피로감이 묻어나는 눈으로 올려다본 지하철 역 광고판에는 혼탁한 시야로도 확연히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큼직한 문구들이 박혀 있었다. 최근 트렌드에 맞게 세련된 스타일로 폰트가 정돈되어 있었는데 이는 나에게 역설적으로 미숙했던 대학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 스펙을 쌓기 위해 막무가내로 대기업들에서 주최하는 각종 공모전에 매진했던 시기가 있었다. 지하철이나 버스 정류장에 설치하기 위해 고안했던 목업 디자인에대한 감각은 예선의 문턱조차 넘지 못한 그때 이후로 큰 발전이 없었다. 맨 땅에 헤딩하면서 서투른 솜씨로 공모전에 제출할 자료들을 만들던 그 시절의 난 졸업을 앞두고 다가올 취업 준비에 대한 부담감 말고는 세상사에 큰 관심이 없었다. 아니 관심이 있었다한들 지극히 소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