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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의 소설방

같은 햇빛 아래일텐데도 본문

에세이 및 단편소설

같은 햇빛 아래일텐데도

Samesun 2021. 10. 1. 21:29



온 바닥을 새하얗게 덮을 정도로 강렬했던 폭설이 불과 며칠전 이 도시를 휘몰아쳤었나 내 기억을 의심해볼 정도로 낮 기온이 꽤나 올라갔다. 절기에 대해서 의식하고 사는 편은 아니었으나 대한이 지나서 그런지 세상을 얼어붙게 만들 정도로 지독한 추위는 이젠 그 세력을 잃고 한 구석으로 물러난 것처럼 보였다.

매서운 찬바람을 온 몸으로 견디며 요란스럽게 낑낑대며 걸어가던 아침의 출근길이 유난히 평온해보일 정도였다. 지하철 역에서 회사 건물까지 불과 몇백미터의 사이를 두고 있었음에도 지금의 기온을 회복하기 전까지는 어찌나 그 추위가 혹독하게만 느껴졌는지 모른다. 그 뼈를 에는 고통이 유달리 월요일에만 더 크게 느껴졌던걸 보아하면 비단 기후 탓만 하기는 내심 염치가 없기도 하다. 그런데 이토록 따뜻해진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매번 출근길에 발도장을 찍어낼때마다 하루의 일과를 어떻게든 마치고 나서 다시 돌아올 이 길의 모습까지 머릿 속에 뚜렷하게 그려지진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살 수 밖에 없는 풀리기 힘든 저주에 걸린 것 마냥 아무리 눈비가 섞인 강풍이 분다한들 언젠가 다시금 돌아올 길까지 마음에 그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같은 햇빛 아래일텐데도 불구하고, 심지어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매번 비슷비슷함에도 불구하고, 하다못해 내가 걸어가는 이 길이 종국엔 다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똑같은 길임에도, 출근길과 퇴근길은 전혀 다른 인상을 풍길 정도로 내 안에서 동일시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저 상이한 목적지를 가진 독립적인 길들 중에 하나였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을 실감하기 전부터 난 이미 뒤돌아보는 법을 잊는 삶의 방식에 완벽히 적응해버린 모양이었다.

영원히 마주하지 못할 내 뒷 모습이 이내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삼켜진다. 화려했던 비루했던 그 모양을 매번 달리했던 내 인생의 많은 순간들이 금새 과거가 되어 뿌연 기억 속으로 산산이 흩어진다. 어떤 순간들은 차곡차곡 주머니에 담아보려 하지만, 앞으로 한 걸음 두 걸음 발을 옮기고나면 그 모든 순간들은 서서히 다음 차례의 새로운 순간들로 자리를 바꿀 뿐이다. 매일 매순간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면서 나는 과거의 나와 끊임없이 분절되는 것 같다. 간직할 수 없는 무수한 나 자신들이 조금은 다른 날들 속에서 오늘도 출퇴근을 하기 위해 이 길을 밟고, 여전히 머리 위로 내리쬐는 강렬한 햇빛만이 변함없이 유일하다.

(21.2.20 퇴근 중 지하철에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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