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의 소설방
여전히 그녀는 본문

그녀는 하릴없이 거리를 걸어다니다가 문득, 그녀를 둘러싼 세상이 거칠게 자신을 위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속을 뒤집어보고 찾으려고 애써보아도 손에 잡히지 않는 핸드백 속 작은 립밤처럼 그녀 주변으로 시시각각 좁혀들어오는 위험 속에서 달아날 수 있는 방법은 찾기 힘들어보였다. 그도 그럴것이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들이 자꾸만 그녀에게 쏟아져들어왔고, 그녀는 종종 자신의 주변을 송두리째 흔들어대면서 휩쓸고 가는 거센 물살 속에서 간신히 억센 나뭇가지 하나에 매달려 위태롭게 생을 부지하고 있는 것 같은 위기감마저 들었다.
단지 자신이 원하는 사람에게서 온전한 사랑을 받는 건강한 관계를 소망했던 그녀에게 세상은 놀랍도록 그 소원은 우스꽝스러운 것에 지나지 않다고 말하면서, 온 사방이 떠나가라 요란하게 비웃어대는 듯 했다. 이제는 반복되는 부조리한 불운들에 걱정스러움보다도 당혹감이 앞섰다. 왜 내가 정말 간절히 바라는 만족스러운 연애는 성립되지 않는 걸까 하면서 스스로를 한탄해본 적도 있었다. 언제적인지는 모르지만 우울함보다는 행복한 인생을 선택하기로 결정한 그녀는 결코 자신의 감정에 슬픔과 같은 처연한 기분들이 섞이지 않도록, 그렇게 함으로써 최선을 다해 행복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자신의 삶의 모토로 삼았었다.
하지만 그러한 삶의 신조가 흔들리게 만드는, 갓 세탁한 흰색 셔츠에 누런 물이 들게 하는 그런 더럽고 비열한 사건들이 이따금씩 그녀의 감정을 흔들리게 만들었다. 그녀의 잘못은 없을거라고 스스로를 달래보았지만 그런다고 한들 상황이 호전되긴 어려웠다. 그녀의 핸드폰과 사무실 컴퓨터의 메신저 기록들은 그녀에게 닥쳐온 비극적인 순간들을 그녀 못지않게 잘 기억하고 있었다. 원치 않은 상대의 간절한 연락 만큼이나 그녀의 심경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없었다. 그건 일종의 폭력에 가까웠고, 특히나 그 상대가 지위가 더 높은 경우에그녀는 불만어린 대꾸 없이 묵묵히 받아내야만 했다. 그저 멀쩡한 척을 하는 것이 주된 일과였던 하루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삶의 방식은 그 안에 담긴 선한 뜻과 상관없이 누군가에겐 전혀 본심과 다른 엉뚱한 감정으로 비쳐보이는 경우가 있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무언가 여지를 둘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나 자책해보아도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일련의 순간들에서 잘잘못을 가리는 것이 무의미해보였지만, 그녀는 계속 어디서부터 악순환의 고리가 시작되었는지 궁금했다. 그녀는 스스로 만들어낸 법정에서 피고인이 되었고, 몸서리끼치는 경험을 증언하는 증인이 되었고, 원하는 판결을 내리도록 유도하며 재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애쓰는 변호사가 되었고, 소송의 전 과정을 함께하며 눈물 흘리고 또 웃음 짓는 한 명의 방청객이자 그 법정을 새까만 옷을 입고 무뚝뚝한 표정 속에 감정을 감춘 채로 지켜보는 경비가 되었다. 다만 어떤 재판의 결정도 내려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그 진부한 재판의 구성원이 되어 과거를 반추할 뿐이었다. 애초에 공정한 재판이 성립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어찌보면 그저 단순한 희생양일뿐이었으니까.
가급적 초연한 마음가짐으로 살아온 나날들이지만 한때는 평범한 남들처럼 눈두덩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이따금씩 미간이 욱씬거렸고,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입술이 후들후들 떨려왔고, 양 쪽 귀가 멍해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런 때가 아주 가끔 있기도 했다. 받아들이기 힘든 순간들은 금새 지나가면 다 잊혀질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한번이라도 시간에 배신당해보지 못한 걸까.
어떤 기억들은 지나쳐가는 속도가 꽤나 느렸고 더 많은 인내심을 필요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녀는, 자신의 법정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다. 실제로 세상에 맞서서 결판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웃으면서 빵을 한 입 베어먹는데에 행복을 느낀다. 오래전 세워놓은 그녀만의 법전 속 기준들은 장대비가 내린 후에도 맑게 개인 하늘 아래서 우뚝 솟아있다.
오늘 하루 기상했을때, 새로운 인연을 찾기 위해 낯선 이와의 만남에 나설때, 그녀가 설레지 않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여전히 그녀는, 슬픔 속에 자신을 가두는 어리석은 행동만큼은 최후의 일로 남겨두었다. 숱하게 변해가는 사람들 속에서 그녀의 본래의 성질을 지키는 것, 단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벗어날 수 없는 삶의 궤적 속에서 때론 여전함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존중할만한 일이 된다는 걸. 때론 완벽히 검증하거나 계산할 수 없기에 더 완벽한 것들이 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여전함이 그렇다. 외로움에 한껏 지쳐 흔들리고 주변인들에게 놀림받을지언정 재가 되어 사그러들지 않고 소중한 햇살 하나라도 품에 안고 피어나려고 애쓰는 봄날의 새싹같은 신념을 간직한채로. 여전히 그녀는. 살아간다. 꿋꿋하게.
'에세이 및 단편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치스러운 밤 (1) | 2021.11.04 |
---|---|
널 기다리며 (0) | 2021.10.29 |
퇴근하지 못한 자, 모두 유죄 (1) | 2021.10.27 |
가장 따스한 곳에 몸을 눕힐 수 있기까지 (0) | 2021.10.26 |
결별 (0) | 2021.10.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