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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의 소설방

연말의 짧은 소회 본문

에세이 및 단편소설

연말의 짧은 소회

Samesun 2021. 12. 3. 15:48


매일 하루가 거의 비슷하게 돌아가는 회사에서도 유독 연말이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하게 하는 것들이 있다. 건물 1층 로비 한 구석에 아침부터 온갖 고급스러운 선물용 화분들이 즐비해있는것이나, 의기양양하게 호통을 치던 임원의 목소리가 인사 통보 이후로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된다거나, 파쇄기 옆에 미처 갖고 가지 못한 퇴사자의 짐더미들이 쌓여있다거나 등등이 요새 같은 시기에 볼 수 있는 장면들이다. 나는 회사 건물 뒷골목에 줄지어 서 있는 카페들 중 한 군데에 들러 커피를 사들고 출근하면서 정신없이 흘러가버린 일년을 생각했다. 제법 추운 한기가 옷깃에 스며드는 날씨였음에도 뜨끈한 커피를 손에 꼭 쥐고 있어 버틸만 했다.

질주하는 단거리 선수처럼 시간은 숨가쁘게 지나가버렸고 그동안 마신 커피의 색 만큼이나 내 눈가의 그늘은 어두워졌다. 몇몇의 사람들은 떠나갔고 다시 또 몇몇은 남았다. 난 원하든 원치 않았든 남아 있는 사람들에 속했다. 떠나간 사람들은 그들의 원래 모습이 어떠했던 간에 놀랍도록 금새 잊혀질 터였다. 사라진 사람들의 빈 자리를 돌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자연으로 돌아가버렸다고 해도 무색할만큼 풀이 무성하게 뒤덮여있고 흐르는 세월 속에 그대로 방치되어 누군가가 잠시 이 세상에 존재하긴 했었다는 작은 흔적으로만 남아 있는 무덤들을 떠올렸다. 누군가는 묘비 앞에 술잔을 털어내면서 불안을 잠시 내려놓고 안도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다음 일년을 어떻게 버텨내야 할지 깊은 고민에 잠겼을지도 모른다.

회사 건물 안으로 가지각색의 소회를 마음에 품고서 차례차례 오고 가는 사람들 사이에 우두커니 연말의 풍경을 바라보는 내가 있었다. 알바의 서투른 솜씨로 만든 탓인지 오늘따라 탄내가 진하게 배어 있는 커피를 마시면서 나는 이런 식으로 시작될 하루들이 앞으로 얼마나 더 남아있을지 계산해보았다. 술에 한껏 취해서 택시를 잡지 않고선 휘청거리며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었던 밤들과 전날에 대한 후회와 피로 속에서 밝아오는 아침들이 수없이 반복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다 언젠가는 나 역시 앞서간 다른 사람들처럼 이 곳에서 떠나간다 할지라도 그동안 쌓아온 노고가 완전히 헛된 것만은 아니었기를 희망할 뿐이었다.

때로는 치열하게 또 때로는 여유롭게 보내려고 노력했던 한 해가 저물어간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그랬듯이 여전히 마음 속엔 어떠한 앞날이 도래할지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이 공존한다. 막상 다음 해가 되고 나면 섣불리 쌓아둔 걱정들은 실상 별거 아닌것들로 판명될 소지가 다분함에도 말이다. 또한 지나간 실수들에 대한 반성을 채 마치기도 전에 새로운 기억들이 가득 채워질만큼 시간은 잽싸게 흘러갈 것이다. 그러다보면 다시 연하장에 어떤 문구를 적어야할지 궁리하는 시기가 찾아올 것이다. 찬 바람이 숭숭 부는 길거리와는 다르게 일부 직원은 더위를 느끼고 있을 정도로 따스한 사무실에서 나는 서둘러 올해까지 마무리지어야 할 업무들을 정리했다. 올해도 크고 작은 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결국엔 무탈하게 잘 넘어간 편이었다.

어느덧 날씨가 제법 추워진 걸로 보아 곧 눈이 내릴 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소복하게 눈이 쌓여 투명한 빛깔로 반짝거리는 거리에서 쏘다니는 상상을 하며 나는 마우스를 슬며시 내려놓았다. 한 해 동안 정신없이 버텨내느라 고생이 많았는데 이정도쯤 딴청을 피우는 건 괜찮을테지. 이렇게 스스로를 다독거릴 시간도 분명 필요할테니까 말이다. 난 일을 잠시 멈춘 상태로 핸드폰을 꺼내서 메모장을 켰다. 평소엔 자주 연락을 하지 않다가도 지금 시기가 되면 으레 안부 인사를 주고 받던 오래된 친구들을 위한 편지를 쓰기 위해서였다. 한참동안 핸드폰을 붙잡고 고개를 까딱거리다가 나는 천천히 첫 줄을 적기 시작했다. 눈밭 같이 새하얀 화면 위로 검은 글자들이 발자국처럼 점점이 찍혔다.
오랜만이야, 잘 지내지?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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