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및 단편소설

작은 징조들

Samesun 2021. 12. 16. 12:29


회사 화장실에는 건물 뒤편 광경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커다란 통창이 달려 있다. 돈을 받고 팔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조악한 수준의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운 다음, 칫솔질을 열심히 하면서 나는 멍하니 창 밖에 시선을 빼앗기곤 했다. 한껏 강렬하게 출퇴근길을 위협했던 찬 바람이 잠시 물러간 터라 거리를 돌아다니는 행인의 수가 오늘따라 더 많아진 듯 했다. 골목 구석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씨와 상관없이 늘 담배를 피는 무리들은 여전했다. 혹자는 비흡연자의 경우에 일 년에 하루 이틀 더 휴가를 줘야 한다고 농담삼아 말할 정도로 끽연가들은 수시로 자리를 비웠다. 그들은 전쟁터와 같은 이 곳에서의 통증을 잊게 해주는 모르핀 주사를 맞으며 살아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누구도 흡연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하다못해 회사 대표가 결벽증을 갖고 있어 담배 냄새를 맡을 때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을 정도로 싫어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매일같이 골목의 하늘 색을 어둡게 칠하며 사람들이 뻑뻑 피워대는 담배와 그들이 남기고 가버린 꽁초들을 죄다 긁어모아서 지구 밖으로 던져버리면 도심 속 생활이 조금은 더 풍요로워질 것 같았다. 내가 이를 닦을 때마다 하는 오만가지 상상들 중 하나였다. 다음 번엔 좀 더 연한 향이 나는 치약을 사야겠다고 생각하며 난 입가에 묻어나오는 거품이 떨어지지 않도록 칫솔을 바로 잡았다. 화장실 안에는 어디론가 숨어버린 벌레들 빼고는 오로지 나 혼자 뿐이었는데 그래서 더욱 마음이 편해졌다. 직원들로 꽉 들어차있는 갑갑한 사무실보다 잠시라도 정적이 감도는 이 곳은 거의 유일하게 머리를 비우고 있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종일 시답잖은 일들에 치이다 보면 이렇게 열을 식힐 시간이 필요했다. 이젠 다른 회사로 이직하여 영영 볼 수 없게 된 과장 역시 비흡연자였기에 담배를 피는 대신 하루에도 여러번 칫솔을 들고 화장실로 항했다. 치아 건강이 나빠질래야 나빠질 수가 없는 버릇이었다.

지금에서야 그가 이미 이 곳에서 마음이 떠난 상태였다는 걸 알지만 그 당시엔 팀원 누구도 과장의 속내를 눈치채지 못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사람이 떠나간 빈 자리를 마주하고 나서야 뒤늦게 깨닫게 되는 징조들이 있다. 불과 한두 시간 전에 화장실에서 칫솔을 들고 있는 과장을 우연히 마주친 것 같은데, 또 다시 화장실에 들어와서 치약을 바르지도 않은 칫솔을 입에 물고 창 밖을 반쯤 비어있는 눈으로 내려다보던 과장의 모습은 지금도 기억 속에 어떤 장면으로 남아 있다. 당시 공사 중이던 건물 뒤편의 부지엔 이젠 성냥갑같이 생긴 길쭉한 오피스텔이 들어섰지만, 그 흙먼지 날리던 작업 현장을 가장 많이 지켜보았을 사람 중에 하나인 과장은 그 완성물을 끝내 보지 못했다. 오래도록 지속되었던 철야 근무와 상사들의 모욕적인 언행에 시달리면서 그는 점차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을 것이다. 그가 버텨냈던 시간들 내내 팀원들 역시 각자의 고난에 잠겨서 서로를 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팀에 딱히 정 붙일 사람도 없었고, 계속되는 정신적인 압박 속에서 앞날에 대한 물음표만 커졌을 것이다. 치아의 겉 표면이 바래지는 것도 모른 채 수없이 닦아내고 또 닦아내는 나날들을 거치면서 그는 이 곳에서 그려볼 수 있는 모든 미래들이 그가 원하는 바에 결코 도달하지 못함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그는 팀원들과 야근을 앞두고 함께 먹어야 하는 저녁 내내 말수가 눈에 띄게 적어졌고, 사무실의 밝은 형광등 아래에서도 거무스름한 그늘이 얼굴에 가득해졌다. 동기들과의 메신저 단체방에도 출현하는 일이 줄어들었고, 그는 점차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지워갔지만 남에게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는 팀원들은 누구도 그의 경계가 투명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도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조용히 이직을 준비했고 가장 바쁜 연말 시즌이 끝나자마자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퇴직 의사를 밝힌 그를 보면서 팀장이 느낀 일말의 배신감은 그가 그동안 감내해야 했던 좌절감과 괴로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었다. 사직서의 내용은 비교적 깔끔한 편이었다. 업무 과다로 인한 퇴직이라고만 적혀있을뿐, 부사장의 폭언이나 강도 높은 정서적인 압박 등 직장 내 괴롭힘과 연관될 수 있는 치명적인 사유들에 대해선 별도의 주석을 다는 일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짐을 챙기기 전에 나를 따로 불러내어 커피를 손에 쥐어주면서 그동안 잘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만 남길뿐 그 뒤에 나눈 별다른 얘기는 없었다. 나 역시 그저 앞날을 응원하면서 아쉬움이 담긴 가벼운 작별 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그의 퇴사로 인해 부서 분위기가 달라지는 건 크게 없었지만 다들 마음 속에 어떤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한 건 분명했다. 그건 모든 자료들을 파쇄하고 하드를 포맷시키면서도 그가 유일하게 남기고 간 유산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향후 거취에 대해서 뜬소문만 무성했지만 나는 어디에서든 그가 행복해하고 있을거란 이유모를 확신이 들곤 했다.

막상 그가 동료 직원이었을때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그의 행동들이 이제서야 창에 희미하게 비추어보였다. 꽤 오랜 세월을 이 곳에서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피할 수 없었던 허무함을 털어내던 칫솔질을 이젠 내가 하고 있는 셈이었다. 잠깐의 청승을 마치고 다시 업무를 하러 돌아가려는 찰나 어떤 물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유실물이나 다름없는 버려진 칫솔 하나가 세면대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게 어쩌면 오래전 떠나간 과장이 두고 간 게 아닐까 하는 가당치 않는 상상을 하다가 난 사무실로 돌아왔다. 언제고 나 역시 이 곳을 벗어나는 날이 올테고, 그제서야 눈썰미 있는 누군가는 평범하지만 살짝 달랐던 모습 하나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한숨 쉬기를 곧잘 하던 대리 한 명이 오후의 태양이 환하게 떠 있는 동안, 햇살이 잘 드는 화장실 창 앞에 한참동안 서서, 업무 일과가 끝나가는 것도 모르고 정적에 잠겨 있기를 좋아했다는걸. 그런 작지만 확실한 징조들이 있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