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스마일

곧 출발을 앞두고 있었던 비행기가 결항되었다는 소식이 직원의 안내와 전광판의 깜빡이는 붉은 문구를 통해 전해졌다. 갑자기 몰아친 폭우 탓이라는데 난 여지껏 기다려온 시간이 배로 늘어난 상황에 무척이나 싫증이 났다. 오늘 자정까지 부산에 있는 회사를 방문하고 시찰한 후에 몇 장의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다. 방문할 곳은 총 세 군데였는데 이른 새벽 비행기를 타고 도착해서 온종일 쉴새없이 돌아다녀야 납기 안에 업무를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 이렇게 타이트하게 일정을 진행하는 건 온갖 크고 작은 보고가 몰리는 연말 시즌에는 불가피한 일이었고, 난 그나마 다른 동기들에 비해 교통이 편리한 대도시로 배정받았기에 그럭저럭 수용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사태가 벌어지는 걸 적절한 범위 내에서 수습하는 것이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지는 이 조직 사회에서 난 느닷없는 교통 지연에 대한 경험은 아직까지 전무했다. 떠나간 버스는 돌아오지 않으니 애태우지 말라는 흔한 말은 있지만 출발하지 못하는 버스에선 어떻게 해야 한다는 조언은 어디에도 없었다.
물론 무작정 기다려보는 것 말고는 아무런 대안은 없었고, 난 입술을 깨물으며 애꿎은 서류가방을 의자 위에 내팽개쳤다. 원래부터 폭력적인 성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수치 하나라도 틀리면 머리를 내놓을 각오를 해야 하는 업계 특성상 늘 예민하게 신경이 곤두서 있었던 탓에 그 기질이 더 강화되었다. 가느다란 눈을 하고 계획을 분 단위로 수정하면서 단단히 심통이 난 표정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이 이젠 낯설지가 않았다. 우선 세수부터 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는걸로 흥분을 좀 가라앉히기로 했다. 공항에서 제일 맞닥뜨리기 싫은 지금 같은 순간에 처하게 되면 어딘가에 연락을 하기 마련이다. 때늦은 도착을 예감하며 그 사유를 설명하고 면죄부를 얻기 위해. 그러나 난 통화 버튼을 누르기를 망설였다. 속으로는 오늘 방문 일정을 연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급변한 상황에 대해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할 정도로 내 반사신경이 고장나버린걸까. 최근 들어 정상적인 퇴근 시간 이전에 귀가한 적이 없었던 탓에 가엾은 두뇌가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혹여라도 한두시간만 더 버티면 날이 놀랍도록 개어서 비행기가 뜰 수도 있다고 막연한 희망을 품은 걸까.
내 인생에서 보기 드물게 신중한건지 단순히 심정적으로 두려운건지 지금의 내 상태를 한 마디로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그저 잠시동안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하도록 생각을 아예 멈춰버린 걸지도 몰랐다. 지금보다 생기와 젊음을 조금은 더 갖고 있었던 대학생때부터 난 종종 이런 교착 상태에 처해왔고 또 금새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늦어지면 도착도 하기 전에 행선지를 바꾸는 편이었다. 차라리 일찍 포기하는 게 애매하게 늦는 것보다 마음이 편했다. 수업시작 시간까지 강의실에 닿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면 중간에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가는 차를 탔다. 단념에 대해서 누구보다 빠르게 정의내리고 또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그 바람에 내 삶의 궤적이 중간중간 툭툭 끊기는 선들을 억지로 이어붙인 모양을 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멀리서 보면 하나의 단일한 방향을 보이는 덩어리처럼 보이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그 겉면들이 결코 매끄러운 편은 아니었다. 지금의 내 모습도 살짝 삐져나간 선의 끄트머리에 놓여 있었다.
이대로 모든걸 관두고 싶다는 생각에 자석을 매단 것처럼 강하게 끌리기 시작했을때, 갑자기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매번 입가에 미소를 띄우는 회사 동료였다. 그는 산전수전 다 겪어본 베테랑도 아니었고, 나와 같은 경력도 부족한 신출내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남들보다 몇 배로 세월을 보낸 것 같은 특유의 여유로움을 항상 장착하고 있었다. 평소에 남에게 큰 관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활기차보이는 그에게 난 호기심이 생겼다. 사회초년생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난관들에서 오는 압박감에서 그는 혼자서만 온전히 자유로운 것처럼 행동했다. 어떤 어려운 일감이 주어지더라도, 하다못해 악명높은 상사의 히스테리 섞인 야단과 짜증을 받으면서도 그는 항시 부드러운 표정으로 일관했다. 새벽 세시에 퇴근하는 길가에서 그가 밝게 웃으면서 지나가는걸 본 사람도 있다고 할 정도였다. 많은 직장 동료들이 그를 두고 생불의 재질이 있다고 할 정도로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그가 방문한 고객사들은 앞다투어 호평을 보냈다. 평판 관리에 큰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 나로서는 그의 초인의 경지에 다다른 탁월한 정신력이 신기하면서도 기괴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업무 능력도 그의 낙관적인 태도에 뒤지지 않을 정도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인사팀에서 저런 사람을 어디서 뽑아서 데려왔냐고 캐물을 정도였다.
이젠 화제의 인물이 되어버린 그에 대해 난 언젠가 자세히 알아볼 기회를 얻은 적이 있었다. 올해 여름 난 그와 같은 곳으로 단기 출장을 갔었다. 에어컨이 고장나 대여섯시간 동안 찜통 속에서 달리던 버스를 묵묵히 견뎌내고, 경비를 줄이기 위해 대충 잡은 듯한 허름한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자마자 흥겹게 콧노래를 부르는 그에게 난 혀를 내둘렀다. 출장 내내 도통 화사함과는 거리가 먼 상태를 유지하기로 한 내 결정에 유일하게 반대표를 든 것이 그였다. 딱딱한 베개에 아무렇게나 얼굴을 파묻고 잠이 든 다음 날, 아침 일찍 미리 준비한 문서들을 들고 그와 함께하는 첫 미팅에 나섰다. 우리가 방문한 회사는 어딘가 큼큼하고 불쾌한 냄새가 나는 건물이었는데 작은 회의실 안에는 탈취제라도 뿌렸는지 그나마 사정이 좀 나았다. 마스크를 쓰고 있음에 감사하며 미팅이 시작되었는데 곧 불편한 실체가 드러났다. 고객사가 사전에 보내준 자료와 직접 현장을 보고 알게 되는 실제 사이에서 발생하는 간극들은 늘상 있기 마련이었으나, 이번만큼은 그 차이가 더 극심하게 벌어져 있어 손쓰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마치 대륙 어딘가에 존재하는 거대한 협곡 사이로 몸을 내던진 것처럼 막막한 심정에 나는 미간이 자동으로 찌푸려졌다.
변명으로 일관하는 상대편 입장을 들으면서 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안에서 곤하게 잠들어있는 내 모습 만을 상상했다. 더 이상 앉아 있을 필요도 없다는 판단 하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쥐는 내 옆에서 그는 놀랍도록 평온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 결별을 향해가는 연인이 억지로 마주앉아 있는 것처럼 냉랭한 분위기의 회의실에선 사뭇 어울리지 않은 표정이었는데 상대편은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태연자약하게 해야 할 말을 하고 해야 할 처리를 했다. 메모장에 아무렇게나 적어놓은 낙서를 흘깃거리며 신경질을 부리고 있는 나와는 전혀 달랐다. 그는 심지어 종국엔 악수까지 나누며 예의 그 환한 웃음을 사무실 곳곳에 남겨두었다. 퀴퀴한 건물 내부에 조금은 연한 빛이 새어들어온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이러한 그의 밝음과 전혀 무관하게 난 우리의 이번 출장이 명백히 헛수고임이 판명되어 몹시 기분이 어두워졌다. 서울로 다시 돌아가기 전 그가 맥주집에서 간단하게 뒤풀이를 하자고 할때에도 난 거부반응부터 일었지만, 왠지 모를 변덕에 그의 제의를 승낙했다.
맥주를 한 잔 이상 들이키기 힘들 정도로 몸이 무거웠지만 난 금방 술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안주 양은 서울에 비해서 놀랍도록 많았는데 가성비를 찬양하는 사람들이라면 환장할 만 했다. 푸석거리는 먹태 조각을 입에 집어넣으며 난 그에게 그동안 품어 왔던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 매번 평화롭기 짝이 없는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건지에 대해서. 나선으로 되어 있는 계단을 낑낑거리며 올라가는 대부분의 사람들 속에서 그는 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까지 직행하는 사람처럼 삶을 대하는 태도가 무척이나 손쉽고 간단했다. 그가 말하길, 자신이 이렇게 살고 있는건 확실한 이유가 있다고 했다. 어떤 신념이 그를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게 종교적인 신앙에 관한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웃으며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전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믿지 않아요. 뜬금없는 철학적 사유가 등장하여 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자유의지가 없다면 우린 다 정해진 법칙이나 규격대로 짜맞춰져서 살아간다는 말이 된다. 모든 것은 원자보다 더 작은 단위에서부터 이미 결정되어 있고, 우리가 사고하고 행동하는 모든 양상은 그러한 작은 입자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특정한 패턴을 따를 뿐이라고 그는 말했다. 우린 패턴들이 결합하여 이루어낸 크고 작은 힘에 의해서 구성된 시공간 속에서 이리저리 이끌려다니는 존재들일 뿐이고, 우리의 의지 역시 허상에 불과하다. 우리가 느낀다고 착각하는 감정이나 열정 같은 것들은 어디까지나 두뇌를 구성하는 미세한 신경 세포들이 발산하는 화학적이고 전기적인 신호의 충돌에 불과하다. 당신의 내일은 어제의 어제에 이미 결정되었고, 당신은 무수한 과거 패턴들의 퇴적물에 다름없다. 물리학적이고 논리학적인 근거들이 이미 충분히 쌓여서 자유의지의 존재성에 대한 자신의 의심에 대해 반박이 불가능할거라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난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그의 선언과 같은 말들에 당혹스러웠지만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그러한 신념과 그 평화는 어떤 유별난 관계가 있는 건지 난 도로 물었다.
잘 아시다시피, 사람들은 자신들의 미래가 모두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해요. 자신의 뚜렷한 의지대로 삶을 이끌어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죠. 물론 그러한 자기방어가 있어야 정신이 버틸 수 있다고 봐요. 생존을 위해선 스스로를 속일 필요가 있죠. 하지만 전 알아요. 내가 할 수 있는건 이 세상에 단 한 톨도 없다는 걸.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세상을 형성하는 무한한 흐름들만이 존재할뿐. 그 외에 다른 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문득 절망스럽고 두려울 때가 있었어요. 우린 영혼이 없다는 사실 말이에요.
그의 동공이 너무도 깊고 어두워져서 난 소름이 끼쳤는데 그는 그런 내 감정적 변화에도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애초에 내가 느낀 이 감정도 그에겐 우리가 흔히 느낀다고 하는 감정이 아닌 시냅스 간의 전기 신호를 주고 받다 생기는 마찰 정도로 여겨졌을 것이다. 부싯돌끼리 서로 부딪치며 몸을 불태우는 물리적 수준의 마찰. 연거푸 들이킨 맥주 탓인지 목 안이 뜨겁게 불타오르는 느낌을 받으며 난 계속 귀를 기울였다. 악마에게 모든걸 빼앗겨버린것처럼 영혼도 의지도 열정도 감정도 없는 이 세계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전 그 질문에 제가 여지껏 살아온 세월의 절반 이상을 매달려서 고민했어요. 고뇌하는 밤들을 겪었고 살 의욕을 모조리 잃고 침대와 한 몸이 된 채로 시간을 낭비한 적도 있었어요. 그러다 침대에 말라붙은채로 발견되어도 그게 내 정해진 앞날이겠거니 하면서 말이에요. 그러다 내가 유일하게 바꿀 수 있는 걸 떠올렸어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빈자라도 간신히 손아귀에 쥘 수 있는 것. 바로 어떻게 삶을 살아갈 것이냐는 마음가짐이었어요. 어차피 이래도 저래도 전 끝없는 패턴에 갇혀 있는 존재일테니 어떤 생각을 하더라도 거리낄게 없었죠. 그렇다면 전 무한한 긍정을 택하기로 결심했고, 그때부터 모든 일들을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로 한거에요. 앞으로 저와 세상에 닥칠 모든 미래들에 대한 절대적 수용. 그게 제가 찾은 해답이었어요. 그는 안면에 가득 미소를 머금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붉게 물들은 조명에 비추어져서 그런지 더욱 그의 큰 눈이 희번덕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더 이상 그에 대해 궁금한 것이 남아 있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말수가 줄어든 우린 조용히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를 타기 위해 고속터미널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리면서 각자 자신의 짐을 들고 작별 인사를 건넬 때에도 그의 입꼬리는 뾰족하게 볼 위로 올라와있었다. 그 뒤로 그의 얘기는 간간히 들려왔지만 마주칠 일은 극히 드물었다. 이렇게 폭우가 쏟아져서 공항 바닥에 하릴없이 나앉게되지만 않았어도 그를 다시 기억해낼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난 그라면 아무렇지 않게 어딘가에 연락을 하고, 미소 지으면서 이른 아침을 먹으러 식당을 찾아 유유히 공항 내부를 걸어다녔을거란 생각에 강한 확신을 품었다. 하지만, 난..
내가 타고난 패턴은 그보다 더 지독할 정도로 복잡하고 혼잡스러운 양상을 띄고 있어서 그와 같이 단일한 신념 하나로 버틸 수는 없었다. 난 오늘 보고는 제출하기 어렵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는 내용이 적힌 메세지를 상사에게 보내고 핸드폰 전원을 부실듯이 세게 눌러서 꺼버렸다. 그리고 다신 타지 않을 비행기를 뒤로 하고 자리를 떴다. 이러한 돌발 행동 모두 그의 말대로라면 자유의지의 반영이 아닌 정해진 법칙의 산물에 지나지 않겠지. 내 삶의 궤적은 여전히 거대한 덩어리 안에 있었고, 난 아무리 물장구를 쳐도 그 경계를 벗어날 수 없다. 앞으로 내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정해져있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난 까막눈에 불과했다. 아무튼 다른걸 다 떠나서 녹슨 우산을 망가뜨릴 정도로 세차게 내리는 이 폭우가 언제 그칠지나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옷을 입은 채로 몽땅 젖어버리는 것만 아니면 뭐든 상관없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