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및 단편소설

사치스러운 밤

Samesun 2021. 11. 4. 11:19


술을 진탕 먹고 들어온 호텔 방에서 난 조용히 한숨을 내뱉었다.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하다가 갑자기 끌려나간 회식에서 초록병 안에 담긴 독극물을 얼마나 들이켰는지 모르겠다. 식도가 살짝 간질간질하다 못해 갑갑한 것을 보니 적잖이 술잔을 받아마신 것이 틀림없었다.
침대에 대자로 누웠지만 이상하게도 술 기운이 금방 달아나서 불쾌한 찝찝함만이 느껴졌고 잠은 오지 않았다. 천장에 달려 있는 여러 빛깔의 전등을 멍하니 올려다보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도 없었다. 안구 바깥부터 서서히 시려올 정도로 눈을 크게 치켜뜨고는 바삐 흘러간 하루를 곱씹었다.

두꺼운 유리창이 무색할 정도로 선명하게 들려오는 오토바이 소리와 옆 방에서 배관을 타고 넘어오는 요란스러운 물 소리가 귓 속을 어지럽혔다. 수압이 세지 않아서 이름 모를 저 사람이 샤워를 마칠때까지 분명 한참의 시간이 더 걸릴 것이란 확신에 난 편안한 적막에 잠기는 걸 포기했다. 사무실에서 종일 수십번은 족히 불려진 내 이름이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차라리 배수구 안으로 쏟아져들어가는 사나운 물 소리가 이따금씩 이명처럼 귀 안으로 퍼지는 상사의 성난 목소리보다는 덜 성가시게 느껴졌다. 물은 나를 애써 부르거나 찾지 않고 그저 자신이 흘러갈 곳을 향해 하염없이 흘러갈 뿐이었다. 여러모로 심신이 지쳐 있는 나에게는 말을 굳이 서로 주고 받지 않아도 속내가 통하는 친구처럼 여겨졌다.

오래된 호텔은 어차피 방음도 잘 되지 않아서 다른 호실 투숙객들이 신나게 떠들거나 웃는 소리, 커다랗게 틀어놓은 노래나 티비 소리가 아니라 이렇게 단순한 물소리만 들리는 것은 차라리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예상대로 누군가의 샤워는 길어졌고 난 어느샌가 달라진 환경에 적응해나갔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내 인생은 앞으로도 이러한 사치스러운 고독을 몇 번이나 반복하게 될까. 어쩌면 처음부터 잘못된 버릇을 들인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 난 야근을 하고 다음날 새벽 출근을 해야 하는 강행군과 같은 일정이 잡혀 있을 때마다 종종 이렇게 외박을 한다. 이른 아침 출근에 대한 압박은 만국 공통의 부담일 것이리라. 회사 근처에 있는 비즈니스 호텔은 가격이 엄청 저렴한 편까지는 아니어서 자주 들리기는 부담스러운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또 얼마 안되는 취침 시간이나마 가장 만족스럽게 보내기 위해 다시 여기에 오는 걸 선택했다. 혼자 짧은 밤을 보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이미 몇 번의 방문 끝에 더 이상 여기가 낯선 공간도 아니었기에.

몸에 바르면 오히려 수분을 빼앗아갈정도로 내용물이 뻑뻑하기 그지없는 싸구려 어매니티들이나 벽에 걸려 있는 촌스러운 그림 액자들이 유일한 흠이었지만 그것조차 감수할만 했다. 푹신한 이불에 곧장 얼굴을 파묻고 나면 이리저리 치고박으면서 보냈을 하루 일과의 잔상들이 둥실대면서 머리 위를 떠다녔다. 그러다 내일 오전까지 보고해야 할 자료들이 생각나면 난 숨바꼭질이라도 하려는 듯 더 깊게 솜이불 안으로 파고든다. 술을 아무리 마셔도 새벽이 다가오면 다시 또렷해지는 정신이 야속할 따름이다. 미처 끝내지 못하고 사무실에 두고 온 보고서와 납기가 임박한 업무들이 꼭 이럴때에만 호텔 방 구석에서 갑자기 등장한다. 자잘한 생각을 뿌리치기 위해 난 전등의 불을 모두 끄고 도로 누웠다.

누군가는 협탁 서랍 안에 들어 있는 낡은 성경책을 품에 안고 평온을 찾았을지 모르지만 신자가 아닌 나에겐 그저 깜깜한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커튼 틈 사이로 새어들어온 빛줄기를 눈으로 쫒는 것 말곤 스스로를 다독일만한 방법이 없었다. 은은하게 침구에 배어있는 탈취제 향에 취해버린건지 그렇게 한참을 어둠에 잠겨있다보니 신경이 조금 느슨해져 졸음이 스르르 밀려왔다. 피곤한 몸 상태로 미루어보아 눈 한번 깜빡한 사이에 다시 아침이 밝아올 정도로 곤하게 잠에 빠져들 것이다. 벌써 자정을 알리는 핸드폰 알림음이 멎어갔다. 이 좁은 공간에서 채 몇 시간을 머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를 지불했는지를 다시 계산해본다. 이토록 호사스러운 밤이 우여곡절 끝에 지나가면 그 다음은 어떤 낮이 도래할까. 아무래도 걱정을 최대한 뒤로 미뤄보는 노력을 기울여봐야 할 것 같다. 고된 일과에 비해선 너무도 짧게 남아 있는 이 밤이 아깝기에. 난 악몽만큼은 꾸지 않길 바라며 이내 깊은 잠에 빠진다. 어느덧 샤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