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기다리며

이건 경고하건데 매우 따분한 글이 될 것이다. 몹시 지루함에 분통이 터지더라도 어쩔 수 없다. 난 지금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이고, 그녀는 벌써 한 시간째 연락이 없다. 차라리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킬걸 그랬었나 후회가 남을 정도로 커피는 차갑게 식었다. 원두의 쓴맛이 더 강렬해져서 난 밀려오는 졸음을 버티기 위해 억지로 찻잔을 입에 가져다댄다. 말을 주고 받을 누군가도 없고 널따란 카페 공간 안에 홀로 앉아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수면욕이 내 정신을 공략하기에 더없이 좋은 순간이다.
잠이 들었다가 깬다. 깨었다 싶으면 다시 잠이 든다. 반복되는 잠과 깸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꿈의 파노라마가 펼쳐지기도 전에 다시 스크린이 걷힌다. 환한 조명이 다시 눈꺼풀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평일 내내 일이 많았던 터라 유달리 몸이 피로했던 탓일까. 혼곤한 가운데 여러 시간대의 사건들이 중첩되어 감은 눈 안 쪽 어딘가에 맺힌다. 보고를 제때 제출하지 못해서 신명나게 혼이 났던 일, 억지로 팀원들과의 점심식사에 호출되어 다이어트를 중단할 수 밖에 없었던 일, 그렇게 먹은 매운 낚지볶음 탓인지 속이 안좋은데도 미팅에 참석하기 위해 간신히 참아야만 했던 일, 여러 장면들이 잠깐 내 시야 속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흐릿한 빛깔 만을 남기고 사라진다. 당시에 그런 일들을 맞닥뜨렸던 순간에는 할 수 없었던 말들이 입가에 맴돌다 만다. 이미 종결된 과거에 대해선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다. 이토록 어렴풋하게 비치는 잔상들이 내 숙면을 거슬리게 만든다. 편안한 내 방 침대 위가 아니라는 점 역시.
이윽고 또각거리는 구두굽 소리에 난 다시 눈을 뜨고 현재로 돌아온다. 아쉽게도 내가 기다리던 그녀랑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내 졸음을 깨주기에 충분히 요란스러울 정도의 인기척을 내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적어도 굽이 7센티미터는 되어보였는데 딱딱한 바닥에 닿을 때마다 둔탁한 소음이 울려퍼졌다. 이름 모를 낯선 그녀는 선글라스를 끼고 창가에 앉아서 시큼한 향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를 마신다. 마신다기 보다는 물끄러미 컵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을 바라보고 있다. 원래의 빛깔을 잃어버린 검은 액체가 그녀의 시신경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런 그녀를 바라본다. 매우 일방적인 시선들이 카페 안에 떠돌고 있다.
문득 유자차와 같이 달콤한 메뉴를 하나 더 주문할지를 망설였는데 그러다 일전에 받은 건강 검진 결과를 떠올린다. 당분 섭취를 제한해야 한다는 문구가 여전히 생생하기에, 난 바닥에 찰랑거리며 식어있는 커피 수준에 만족하기로 했다. 평일 내내 바쁘게 돌아가는 업무 속에서 따로 운동할 틈이 없었다는 것도 뻔한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회사원들이 다 당뇨 의심 환자는 아니었기에.
차라리 책이라도 한 권 들고 올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커졌다. 이렇게 기다림으로 보내는 시간이 오후 일과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될지는 예상못한 탓이다. 이러다가 오늘 약속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취소해야 한다는 연락이라도 올까봐 두려워졌다. 기다림의 목적이 상실되고 나면 난 그저 멍청하게 카페 안에 앉아서 눈만 꿈뻑거리고 있는 할일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기에 누군갈 기다리는 일은 언제나 엄습하는 불안을 잘 달래주며 스스로를 토닥거리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가 단순히 변덕스러운 날씨에 맞지 않는 옷을 입어서 도로 갈아입고 온다거나, 혹은 방향을 반대로 대중교통을 탔다거나 하는 지극히 뻔한 이유들로 늦길 바랄 뿐이다. 그 외에 특이할만한 별다른 사건들이 없길. 그저 무사히 내 앞으로 와주기만 한다면 이 애타는 기다림의 보상으로는 충분할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에 빠지는 건 자유로웠지만 어디까지나 내가 앉아 있는 카페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는 협소한 범위 내에 있었다. 어설픈 착각들과 그로 인해 벌어진 실수들만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어느덧 나는 주변 사람이며 사물들에 대한 흥미를 모조리 잃었다. 그저 지금 선명하게 느끼고 있는 공복과 갈증을 달래줄 그녀가 서둘러 와주기만을 바랐다. 여전히 그녀는 깜깜 무소식이었고, 나는 머릿 속에서 공상과학소설에나 나올 법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와 현재 여기저기를 누비고 있다. 그녀와 함께 있을 미래가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남아있을지. 그녀가 내가 있는 이 곳에 도착하게 되면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반갑게 환호해야 할까. 아니면 섣부른 화를 내며 늦은 그녀를 타박해야 할까. 잘 모르겠다. 내 세상은 너무 오랫동안 무정형의 상태에 묶여 있었고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게 없다. 어쩌면 살아갈 날들 대부분이 이런 막연한 기다림의 연속이 아닐까 싶다. 적어도 그녀가 오고 나서야 모든건 다시 쓰여질 터였다. 나는 오늘도, 이렇게 어디선가 오고 있을 너를 기다리고 있다. 그 뒤의 일을 새까맣게 모른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