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를 위한 변명
한번도 맡아보지 못한 향이 피어올랐다. 달콤하면서도 어딘가 알싸한 향. 그건 목청 높여 열정을 부르짖을때 나는 땀내처럼 억센 기운이 스며있기도 했고, 잠깐의 요란한 소나기에 젖어드는 흙의 풋내를 머금기도 했다. 치-익하며 액체성 물질을 강하게 분사하는 소리에 나는 슬며시 파티션 너머의 앞 자리를 쳐다봤다. 사무실 한복판에 위풍당당하게 앉아 있는 P가 향수인지 드레스 퍼퓸인지 드라이 샴푸인지를 한 손에 들고 있었다. 그는 주변의 관심을 아랑곳않고 향의 원인이 되는 무언가를 마치 세례를 받듯이 머리위로 마구 뿌려 댔다.
평소엔 사무실의 다른 동료들이 무얼 하는지 전혀 개의치 않는 나로서는 공기를 타고 날아드는 관능적인 향은 일종의 신호 같았다. 과묵하게 눈 앞의 모니터에만 갇혀 있는 일과는 그쯤 해두고, 주변을 둘러보면서 좁고 진부한 평소의 세계를 조금이라도 확장시켜보라는 무언의 경고음. 숨막힐듯 옥죄어오는 적막보다는 약간의 소란도 발생해야 뻔한 일상이 조금은 더 풍성해질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처럼.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P가 사방팔방으로 발산하고 있는 향은 사무실에 늘상 고여있던 퀘퀘한 먼지 냄새와는 사뭇 달랐다. 그나마 매일 청소를 해서 이 정도 공기의 질이라도 유지되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상하리만치 사무실은 늘 갑갑함의 최선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내뱉는 한숨들이 쌓이고 또 쌓여서 이루어진 공허한 안개구름 같은 이 곳에서 온종일 일에 매달리다 보면 눈이 금새 침침해지고 주변 사위가 흐릿해져 안보이기 십상이었다.
인적이라곤 어쩌다 길을 잃고 헤매는 행인에 불과할정도로 한산한 골목길에서 반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 내가 속한 사무실이 있는 건물이 보였다. 숨이 붙어있지 않은 존재들이나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외진 무덤가를 닮았으려나 하는 가혹한 비유를 들 정도로 침침하게 가라앉아 있는 이 곳에서 P는 유독 본연의 밝고 활달한 성향을 잃지 않는 사람이었다. P는 자신이 원하는 업무를 요구할 줄 알았고, 본인의 신념과 다르다고 생각이 되면 이의를 제기하는데 많은 고민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또한 단단히 구축해놓은 자신의 캐릭터가 거의 매일 비슷하게 흘러가는 이 곳의 나날들 속에서 서서히 변색되어가는걸 극도로 경계하곤 했다. 본래 갖고 있던 개성이라든가 성향 따위를 출근과 동시에 건물 로비에 있는 물품보관함에 집어넣고 자물쇠로 단단히 잠궈놓은 다음, 온통 을씨년스러운 기운만을 풍기고 생활하는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사뭇 달랐다.
거의 대부분의 상황에서 회사에서 정해놓은 딱딱한 절차와 규칙들에만 걸맞게 살아가다 보면 자신의 발언 들을 두고 쓸모를 따지게 되며 자연히 말수가 줄어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렇게 기본적인 법칙에 충실하게 산다고 하면 과연 평온하고 안락한 정서를 느낄 수 있는 것일까? 매일같이 차오르는 스트레스 때문에 수면부족과 불면의 밤에 시달리느라 항상 눈 밑이 거스름하게 그을려있는 나에게 그러한 질문의 해답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무용해지는 내 감정을 바라보며 차라리 마음을 싹 비워내야 한다고 애쓰는 나에게 있어서도 되려 자신의 뜻을 펼치는데 여념이 없는 P는 실로 혁명적인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P의 존재를 잠시나마 잊고 있었는데, 코를 찌르는 이 독특한 향은 마치 성곽처럼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는 책상 파티션을 넘어 쳐들어오는 한 무리의 병사들 같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P의 부산스러운 몸동작을 살펴보았다. 얼마 남지 않은 퇴근 이후에 중요한 약속이라도 있는 걸까. 나는 오랜만에 일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주제에 대해서 이렇게 호기심이 생기는 것이 신기했다. 혁명가는 이제 거울을 꺼내들고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면서 모니터 안에 무수히 떠있는 작업창들을 하나씩 닫았다. 메신저 대화방에선 여러 얘기가 오고 갔고 그 중 일부는 어떤 상황에서도 굽히지 않는 P를 곱지 않은 눈으로 보면서 수근거리기도 했는데 나는 거기에 동참하지 않았다. 평소 뒷담화를 아예 하지 않을 정도로 양심적인 편도 아니었고, 회사에 적응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부류의 사람들과 난 다르다는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무언가 거북스러울 뿐이었다. 본래의 특별함을 서서히 잃어가는 과정에 동화되길 원하는 그들에게 있어서 난 집단의 일치된 의견을 따르지 않는 일종의 배신자나 다름없었다. 단결력을 키우기 위해 소통을 활성화하자며 직원들 모르게 사내 메신저 업데이트에 검열 기능을 끼워넣고 원팀을 외치는 회사의 슬로건이 나에겐 그저 허공에서 부서지는 희미한 메아리로만 들렸다. 그렇다고 내가 적극적으로 그들의 의견에 반대하면서 P를 두둔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내가 그런 위인은 아니었기에.
그럼에도 누군가 P에 대해서 어떤 사람이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에게서 나는 향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엉뚱하리만치 독하고 강했지만 나름 괜찮았다고. 속내가 훤히 보일 정도로 순수하면서도 비교불가능할 정도로 담대한 향을 풍겼다고. 그렇게 답할 수 있을까. 난 메신저 알람마저도 기능에서 꺼버리고 자리비움으로 상태 메시지를 바꾸었다. P는 이제 대놓고 시계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퇴근을 앞두고 초읽기에 들어간 것 같았다. 그동안 숱한 밤들을 사무실에서 지내왔던 것처럼 오늘도 야근의 함정에 빠지지 말고 정시에 그가 퇴근할 수 있길. 그의 혁명이 성공적으로 내 기억 속에 남게 되길. P를 조용히 응원하는 사람이 여기 한 명 생긴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