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및 단편소설

마주치는 영원

Samesun 2021. 10. 8. 12:49


낯선, 그렇지만 조금 익숙한 얼굴의 사람이 조용히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일면식도 없는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붐비는 퇴근 철에서 오로지 그 사람의 얼굴만이 내 시선에 들어온 것은 그 얼굴 안에서 내 기억 속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인식할 수 있었던, 낭만을 꿈꿀 수 있었던 과거의 내가 묻어 놓았던 타임캡슐을 직접 꺼내어 그 흙을 털고 목도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주변 사위가 암전된 것처럼 어두워지고 흰색 빛깔의 스포트라이트가 그 사람의 뒷모습으로 향하는 것을 느끼며 나는 오래전 잃어버린 이름 하나를 간신히 떠올릴 수 있었다. 마치 죽은 이를 대하듯이 그 이름을 투박한 묘비에 박아넣으면 여러 해가 지나고 망각이라는 세찬 바람에 쓸려 글자가 완전히 풍화되어 그 흔적도 남지 않게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착오였다.

마스크를 쓰고 있다고 핑계를 대기엔 호흡이 곤란할 정도로 숨이 갑자기 차올랐다. 평온을 상실하고 괴로움에 휩싸인 채로 보냈던 셀 수 없이 많은 밤들의 파노라마가 지하철에 못지 않은 빠른 속도로 순식간에 펼쳐졌다. 두꺼운 장막을 내리고 온 몸을 어둠으로 칭칭 감은 채 스스로를 한없는 고통 속으로 몰아 부쳤던 절망이 그 깊은 밤의 행렬을 대표하는 하나의 감정이었다. 나는 그 당시의 내 선택에 대해서 명확하게 누군가에게 잘못을 탓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째서 너와 나의 인연은 그토록 지독하게 단호한 결심으로 단칼에 끝을 맺어야 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이젠 알 도리가 없었다. 어리석은 선택을 반복하며 살아왔던 삶이지만, 그 후회의 시작은 항상 그 사람과의 이별이었다.

나는 서둘러 다음 도착할 역이 어디인지를 확인했다. 내 희미한 기억이 맞다면 아마도 내가 평생을 걸쳐 가장 그리워했던 이가 여기서 내릴 것이다. 나의 존재가 잠시동안 같은 공간에 있었음을 새까맣게 모른 채로. 다시 두 개의 서로 다른 점으로 찢어져 영원히 만나지 않는 사이가 될터였다. 무수한 인파 사이로 마치 안개 사이로 스며들듯 사라져갈 그 사람을 붙잡고 다시 어떤 말이라도 붙일 수 있을까. 솔직히 큰 자신은 없었다. 오히려 더 큰 슬픔이 다음 정거장 의자에 앉아서 뒤따라 내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마지막 시절이 어떠했는지를 떠올리면 그 사람이 다시 마주칠 나를 조금이라도 반길 가능성은 무척이나 희박했다.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이 코 앞에 있는 걸 알면서도 발을 담그는 행위는 파멸을 불러올 것이 자명했다. 상상 가능한 온갖 고단한 결과들에 고통받을 나 자신의 신음소리가, 다음 역을 알리는 열차 안내음 사이에 섞여서 일종의 예언처럼 들려왔다. 열차가 멈추기까지 채 몇 초가 남지 않은 시간 동안 나는 이 안에서 가장 오갈데 없는 승객이 되었다.

살면서 마주하는 순간들을 모조리 기억할 순 없으며 대부분의 순간들이 며칠이면 산산조각으로 흩어져 흔적조차 남지 않을 테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 안에서 기억이 작동하는 방식이 다시 시작되지 않는 이상, 꽤나 오래도록 남아서 지긋지긋하게 나를 괴롭힐 것이 분명했다. 비극의 씨앗을 미래에 과감하게 심어 넣는 행동을 할 것인지, 아니면 인생에서 마주쳤던 수 없이 많은 기로에서 그러했듯 모른 척하며 눈을 감고 지나갈지, 나는 숨을 채 열 번도 내쉬기 전에 결정해야만 했다. 어쩌면 열차가 앞으로 남아 있는 모든 역을 지나쳐 종점에 이르고 나서도 나는 저 문이 열리지 않길 바라는 게 아닐까 싶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열차의 바퀴가 노선에 부딪치는 파열음을 듣다 보면 졸음이 밀려 들곤 하는데, 이를 견디며 집으로 향하던 평범한 모습이 이젠 사치에 가까웠다. 확실한 건 열차는 곧 멈출 것이고, 예기치 않은 승객 한 명이 더 하차할지 말지가 정해질 참이었다. 아직도 내면의 갈등이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 와중에 열차는 다음 역에 도착했고, 나는 우루루 내달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반사적으로 그 사람을 따라 내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어진 나의 행동은 열차 안에서 줄곧 지속했던 치열한 고민이 무색할 정도로 단순하지만 명확하고 빠르게 이루어졌다.

기억 한 켠에 항상 걸려 있던 그 사람의 이름을 현실로 끄집어내 큰 소리로 부른 것이다. 만약 열차에서 내리지 않는다면 이대로 뒷모습을 마주쳤던 순간만이 영원토록 남게 될 것이며, 그런 결말 만큼은 원하지 않았던 탓일까. 나는 간신히 목소리를 짜내어 그 사람을 불렀고, 앞서 가던 누군가는 뒤를 돌아보았으며, 놀란 눈이 마주쳤고, 우리 둘을 제외한 모든 세상이 완전히 투명해져버렸고, 내 시야 바깥으로 승객들이 점점이 흩어져 갔으며, 나는 좀 더 용기를 내어 한 발 가까이 다가갔다. 서로의 표정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다음 말을 꺼낼 수 있었다. 투박했던 호흡이 점차 안정되어감을 느꼈다.

이젠 선명하게 안다. 내가 행선지에 관하여 어떤 선택을 하던 피할 수 없는 슬픔이 반드시 오리란걸. 하지만 앞으로도 후회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홀로 남겨진 순간에만 영원히 갇혀서 불행에 잠겨있진 않을 테니까. 오로지 지금만이 내가 슬픔을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기에. 슬픔이여, 안녕. 이제 내게로 와주길.